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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이제(李濟) 개국공신교서(開國功臣敎書)

자료명 1392년 이제(李濟) 개국공신교서(開國功臣敎書) 저자 공신도감, 이제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유형분류 고문서/교령류/공신교서 주제분류 국왕·왕실/교령/공신교서
수집분류 민간/기증·기탁·조사/고문서 자료제공처 고문서자료관(SJ_ANC)
서지 고문서자료관 해제 고문서자료관
원문텍스트 이미지 고문서자료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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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공신교서
· 내용분류 국왕·왕실-교령-공신교서
· 작성지역 한양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 작성시기 1392 (홍무25년10월 일)
· 소장정보 원소장처: 산청 성주이씨 경무공 사당
현소장처: 산청 성주이씨 경무공 사당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수취인 李濟 이제 1392년 10월에 순충좌명개국공신에 녹훈되었다. - 1398 흥안군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발급 功臣都鑑 공신도감

형태사항

· 크기(cm) 36.9 X 112.0
· 판본 필사본
· 장정 권자장
· 수량 1축
· 재질 종이
· 표기문자 한자
· 인장 1 (적색, 정방형, 高麗國王之印)

· 안내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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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392년 이제 순충좌명개국공신 책록 문서
1392년(태조 1) 10월에 흥안군 이제순충좌명개국공신으로 책록하면서 그 공을 기리기 위하여 발급한 문서이다. 이제조선왕조 개국에 공을 세워 배극렴, 조준 등 15인과 함께 1등공신으로 봉해졌고, 밭 170결, 노비 20구를 비롯하여 금대, 단자, 견자를 하사받았다. 이 문서는 본래 비단에 쓰여졌으나 후대로 전승되면서 종이를 덧대어 두루마리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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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392년 이제를 순충좌명개국공신으로 책록하는 문서
내용 및 특징
1392년(太祖 1) 10월에 興安君 李濟純忠佐命開國功臣으로 책록하면서 그 공을 기리기 위하여 발급한 문서이다. 이제조선왕조 개국에 공을 세워 裴克廉, 趙浚 등 15인과 함께 1등공신으로 봉해졌고, 田地 170결, 노비 20구를 비롯하여 金帶, 緞子, 絹子를 하사받았다. 이 문서는 본래 가로 94.5cm, 세로 32.5cm 크기의 비단으로 제작되었으나, 전승되는 과정에서 가로 112cm, 세로 36.9cm 크기의 楮紙를 덧대어 두루마리로 전하고 있다. 교서의 내용은 15자 38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 행에 御寶 ‘高麗國王之印’이 1顆 찍혀 있다.
李濟고려 말 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공민왕대에 密直提學 등의 벼슬을 하였으며, 태조 이성계의 셋째 딸 慶順公主와 혼인하였다. 1392년(공양왕4)정몽주를 살해하는 데에 가담하는 등 조선왕조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봉해졌다. 『太祖實錄』에 의하면, 당시 개국공신의 位次는 1392년(태조1) 8월 20일에 정해졌고, 9월 21일에는 연회를 베풀어 공신교서와 함께 공신녹권을 내리면서 상당한 특전을 내렸다. 이 때 興安君 李濟에게는 특별히 ‘姓’을 하사하여 宗姓과 같이 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후 9월 28일에는 개국공신들이 왕세자 및 여러 왕자들과 王輪洞에 함께 모여 맹서를 하였고, 윤12월 28일에는 개국공신들이 감사의 뜻으로 왕을 모시고 잔치를 열었다.
자료적 가치
본 문서는 개국공신교서로서 유일하게 전래되는 것으로서, 조선 초기 공신에 대한 녹훈 제도를 비롯하여 교서의 서식, 인장, 서체 등 문서의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주기사항

보물 제 1294호 이제개국공신교서(李濟開國功臣敎書)

참고문헌

「조선 초기 功臣敎書의 文書史的 의의 검토-1392년 李濟 開國功臣敎書와 1401년 馬天牧 佐命功臣敎書」박성호 『전북사학』제36호, 전북사학회, 2010

집필자

1차 집필자 : 국가기록유산(www.memorykorea.go.kr), 2차 집필자 : 김봉좌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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