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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일기초고정본(政院日記草稿正本)

자료명 정원일기초고정본(政院日記草稿正本) 저자 승정원(承政院) 편(編)
자료명(이칭) [1638]승정원일기초고본(承政院日記草稿本) 저자(이칭) [承政院(朝鮮) 編] , 승정원 , 승정원(조선) 편(承政院(朝鮮) 編)
청구기호 K2-92 MF번호 MF35-4786
유형분류 고서/일기 주제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일기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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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638(인조 16년)
· 청구기호 K2-92
· 마이크로필름 MF35-4786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가치정보 유일본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승정원(承政院)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18.2 X 13.5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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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638년(인조 16) 8월 15일에서 21일까지 4일간 승정원에서 기록한 草冊이다.
서지사항
본서는 洋紙의 空冊紙에 필사되어 있다. ‘上在昌慶宮停常參經筵 / 戊寅八月十五日乙巳晴’(제1장)과 같이 사건, 연월일, 날씨를 전면에 기재하여 날짜별로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내용을 보완한 첨지가 부착되어 있다. 본문은 초서로, 첨지는 해서로 작성되었다. 뒤표지 면지에는 ‘西紀一九七一年七月 / 藏書閣再裝’이라는 개장 기록이 있다.
체제 및 내용
표지에 ‘仁祖十六年八月十五, 十六, 十八及二十一日分’이라고 적혀 있고, 책제에 ‘草稿正本’이라고 적혀 있는 바, 『政院日記草稿正本』은 『承政院日記』에 成冊하기 전에 만든 속기록, 곧 草冊으로 생각되지만 ‘정본’이란 의미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른 초책과 마찬가지로 날짜와 날씨, 그리고 사실 기사가 초서로 적혀 있지만, 일부 해서로 된 기사도 있고, 끝에 해당 注書의 이름을 밝힌 곳도 있다. 뒷장에 1971년 7월 장서각에서 새로 장정하였다는 주기가 있다.
인조昌慶宮에 거처하고 있었고 常參과 經筵을 중지했다는 기사, 그리고 홍문관에서 李海昌의 削黜이 지나치다며 올린 차자로 시작하는데, 이는 개수본 『승정원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다만 이 草冊의 같은 날짜에도 누락이 있어서 ‘不爲相議’ 이전 기사는 인멸되었다. 21일 좌목 자리에, 承旨 崔有淵, 摠戎使 李時英, 注書 南翧, 記事官 許積·申冕이 기재되어 있는데, 통상의 『승정원일기』 좌목과 다르다.
기사관 허적신면의 이름이 여기에 기재된 것도 이상하지만, 특히 총융사 이시영청나라 상황을 보고하러 입시했으므로 좌목에 나올 인물이 아니다. 개수 『승정원일기』에서는 이들이 인조가 引見할 때 입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초책을 만들 때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주요 인물과 사실을 메모하고 나중에 대화 내용이나 차자, 상소를 추가로 기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초책에는 곳곳에 오류 수정과 첨삭이 이루어져 있다.
특성 및 가치
승정원일기』는 1744년(영조 20)昌德宮 승정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불탔고, 불탄 『승정원일기』를 1747년(영조 23)에 완성한 개수본이 남아 있다. 『政院日記草稿正本』은 인조 당시 작성된 초책으로, 개수한 『승정원일기』에 ‘缺’이라고 표시되어 빠진 부분도 온전히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를 개수할 때 『政院日記草稿正本』를 참고하지 않았던 이유는 알 수 없으며 4일간의 기록에 불과하지만, 1747년 개수된 『승정원일기』에서 누락된 기록을 알 수 있고, 이 시기의 초책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료 가치가 크다.

집필자

오항녕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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