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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일기(政院日記)

자료명 정원일기(政院日記) 저자 승정원(承政院) 편(編)
자료명(이칭) [1743]승정원일기초(承政院日記抄) 저자(이칭) 承政院(朝鮮, 1405~1894) 編 , 승정원
청구기호 K2-90 MF번호 MF35-1383~1384
유형분류 고서/일기 주제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일기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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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사년미상(寫年未詳)
· 청구기호 K2-90
· 마이크로필름 MF35-1383~1384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승정원(承政院)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4.4 X 22.3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불분권(不分卷) 10책(冊)
· 인장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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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43년(영조 19)부터 1748년(영조 24)까지의 『승정원일기』 사본이다.
서지사항
서명은 表紙書名에 근거하였다. 원래의 글자를 筆削하거나 刀割한 자리에 첨지를 부착하는 등의 교정 흔적이 보인다. 책별로 크기가 고르지 않다.
체제 및 내용
본서는 1743년(영조 19) 7월 1일부터 1748년(영조 24)까지의 『승정원일기』 중 일부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의 형식인 날씨, 座目, 국왕의 거둥 기사는 없고, 날짜와 사건 기사만 수록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런 점을 제외하면 내용 구성은 『승정원일기』와 비슷하다.
政院日記』를 『승정원일기』 작성 전에 만드는 草冊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기사를 적은 글씨체가 다소 졸필이며 현존하는 초책과 비교하여 볼 때 글씨가 달필이 아니고 격조가 덜하다는 점 외에도 오류 수정을 위한 교정의 흔적 등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승정원일기』에서 기사를 뽑아 적어 둔 듯하다.
내용 구성은 『승정원일기』와 대동소이하지만, 1743년(영조 19) 7월 6일(『영조실록』에는 5일로 되어 있다) 우의정 趙顯命이 箚子를 올려 相臣의 직임에서 해면시켜 주기를 원하면서 良役査正案을 올린 내용은 현재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均役法 논의의 기초인 조현명의 양역사정안은 이 『정원일기』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특성 및 가치
승정원일기』는 1744년(영조 20)昌德宮 승정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불타버렸다. 洪啓禧의 말에 따르면, 『승정원일기』 가운데 이괄의 난이 일어난 1624년(인조 2) 이후의 일기는 이때 불타버렸고, 1722년(경종 2) 이후의 일기는 완전하다고 하였다. 결국 99년분의 일기가 소실된 것이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746년(영조 22)에 불탄 『승정원일기』를 개수하기로 결정했고, 이듬해 완성하였다.
승정원일기』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888년(고종 25)에 화재로 다시 불탔다. 金炳秀의 말에 따르면 右史堂에 불이 나서 東庫에 소장된 것 말고 『승정원일기』가 많이 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소실된 『승정원일기』 300여 권은 1851~1888년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 시기의 『승정원일기』는 고종 때 일어난 화재와 상관이 없다. 이렇게 보았을 때, 본서에 실린 기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집필자

오항녕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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