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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선생문고부록(漢陰先生文稿附錄)

자료명 한음선생문고부록(漢陰先生文稿附錄) 저자 이기양(李基讓), 이의익(李宜翼)
자료명(이칭) 漢陰先生文稿附錄(傳記) 저자(이칭) 李基讓(朝鮮) 編
청구기호 K2-868 MF번호 MF35-1083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傳記類/別傳/一般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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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869(고종 6년)
· 청구기호 K2-868
· 마이크로필름 MF35-1083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기양(李基讓)

형태사항

· 크기(cm) 31.7 X 20.6
· 판본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전사자(全史字))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4권(卷) 3책(冊)
· 판식 21.3×14.5cm
· 인장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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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조선 중기 李德馨(1561~1613)의 문집인 『漢陰先生文稿』의 附錄이다.
서지사항
白色 卍字紋 표지로 粧䌙되어 있다. 表紙書名은 ‘漢陰文稿’, 版心題는 ‘漢陰先生文稿’이다. 판심제는 版上口에 위치하고, 魚尾 하단에는 ‘附錄’과 卷次가 차례로 위치하고 있다. 표지 서명 하단에는 冊次가 ‘天·地·人’으로 기재되어 있다. 書腦 하단에 ‘共三’이라는 기록이 있다. 書根에는 ‘漢陰稿’라는 書根題와 책차가 기재되어 있다. 卷末 발문을 통해 본서가 1869년(고종 6)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서각 소장 『漢陰先生文稿附錄』(K2-869)과 같은 판본이다.
체제 및 내용
李德馨의 자는 明甫, 호는 漢陰, 謚號는 文翼이다. 廣州人으로, 民聖의 아들이다. 20세에 등제하였으며, 李恒福, 李廷立이 同年이었다. 大提學 李珥의 추천으로 湖堂에 들어가 독서했다. 그 후 弘文正字, 修撰, 校理, 正言, 吏曹佐郞을 지냈다. 1588년(선조 21) 吏曹正郞으로 倭使를 應待, 그 후 直提學, 承旨, 大司諫을 거쳐 禮曹參判을 拜하고 大提學을 겸했다. 壬辰亂에는 수차례 倭將과의 단독 회담에 임했으며, 특히 에 救援使로 갔었고, 돌아와서는 大司憲으로 大兵을 接儐하여 平壤 戰勝, 漢陽 還收에 공을 크게 세워 刑曹判書, 兵曹判書를 拜했다. 丁酉再亂에는 楊鎬의 상대역을 지냈고, 그 공으로 38세에 右議政에 올랐다. 1601년(선조 34)에는 領議政이 되었다. 그러나 言事忤旨하여 領中樞에 遞職되었다. 光海君이 즉위하자 그는 즉위 사실을 알리는 陳奏使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그 후 奸黨 李爾瞻과 대립한 결과 삭직되었다가 광해군에 의하여 復職되었다.
본서는 漢陰의 7대손인 李基讓이 일찌기 한음의 年譜 2卷을 편집하였으나 간행하지 못하였는데, 9대손 宜翼이 7대손 洛基 등과 교정을 가하고 또 誌狀 등을 덧붙여서 1869년 (고종 6)에 刊印한 것이다. 1561년(명종 16) 한음漢陽誠明坊에서 태어난 기사로부터 1599년 39세 때부터 1613년(광해 5) 53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의 記事와 그 후 광해군이 復爵하고 致祭한 事實, 仁祖가 致祭하고 文翼이라 賜謚한 記事, 1634년 長子인 如末에 의하여 文集이 완성된 일, 이외에 李恒福이 쓴 墓誌, 李埈이 쓴 行狀, 鄭經世가 쓴 諡狀, 趙絅이 쓴 神道碑銘, 申欽이 쓴 本傳, 李貴가 쓴 遺事, 象村集 등에서 이덕형에 관한 기사를 뽑아서 엮은 補遺가 있다. 그 밖에 敎書, 批答, 賜祭文, 挽詞, 서원 봉안문 등이 실려 있고, 卷尾에는 1869년 9세손인 의익이 쓴 跋文이 있다.
특성 및 가치
조선 중기 문신 이덕형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 이외에도 문집 발간 및 서원 등에 봉안되는 경위 등이 실려 있어 조선 후기 선조 현양을 위한 후손들의 다양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집필자

최순권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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