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기(忠烈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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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보 해제 xml
일반사항
· 사부분류 | 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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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시기 | 1707(숙종 33년) |
· 청구기호 | K2-846 |
· 마이크로필름 | MF35-708, 998 |
·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주체 - 인물
역할 | 인명 | 설명 | 생몰년 | 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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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겸(趙㻩) 편(編) |
형태사항
· 크기(cm) | 29.5 X 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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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본 | 목판(木版) |
· 장정 | 선장(線裝) |
· 수량 | 1책(冊) |
· 판식 | 반곽(半郭) 22.0×15.2cm |
· 인장 |
李王家圖書之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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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정보
내용
정의
조선 전기 문신으로서 갑자사화로 참살된 知足亭 趙之瑞(1454~1504)에 관한 실기이다.서지사항
表紙書名, 版心題는 모두 ‘忠烈記’이다. 卷末의 “丁亥九月日 晋州長興寺刊”라는 刊記와 刊局有司인 趙汝瑾의 생존 시기를 통해 본서가 1707년(숙종 33)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체제 및 내용
증손 趙㻩이 자료를 모으고 제현들에게 발문을 받고, 曺炅과 趙汝瑾에게 刊局有司를 맡겨 간행한 것이다. 제명을 ‘충렬기’라고 한 까닭은, 연산군이 세자 시절 조지서의 諷諫과 집요한 進講을 혐오해서 1504년 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조지서를 이에 연루시켰고, 이때 참살된 것을 ‘忠’이라 한 것이다. 또한 鄭夢周의 후손인 繼室 鄭氏가 남편이 갑자사화로 죽자 籍沒을 당하고 아들을 데리고 草野를 떠돌아다니는 힘든 상황에도 남편의 제사를 거르지 않았던 행적으로 중종 때 旌閭된 것을 ‘烈’이라고 한 것이다.南冥 曺植이 지은 「中訓大夫侍講院輔德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趙公墓碣銘」, 思齋 金正國의 「思齋摭言」(許篈의 『海東野言』에도 보임), 陰崖 李耔의 『陰崖雜記』(『圃隱集』과 『海東野言』), 『輿地勝覽』, 조식의 「遊頭流錄話」, 「武定寶鑑」, 「晋州誌」, 「遺事」는 5조항으로 『曺先生家傳記聞』에서 뽑은 것이다. 권말에는 발문이 있는데, 1645년(인조 23) 姜大遂(1591~1658), 1645년 許穆(1595~1682), 1644년 河溍(1597~1658), 1646년(인조 24) 河璿(1583~1652), 1644년 10월 李之馥, 1644년 4월 河弘度(1593~1666), 韓夢參, 1647년 3월 成鐄, 1646년 11월 증손 㻩, 1647년 8월 외현손 조경 등의 10명의 발문이 있다.
특성 및 가치
본서 이후에 1760년(영조 36) 9代孫 德常 등이 重刊한 것으로 규장각 소장의 『知足堂趙先生內外忠烈記』가 있다. 이 책과 함께 조지서의 생애와 행적을 이해하는 데 기본 자료가 된다. 현재 일실된 것으로 알려진 『무정보감』이 출전으로 인용되고 있다.집필자
이동인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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