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청재박선생충절록(淸齋朴先生忠節錄)

자료명 청재박선생충절록(淸齋朴先生忠節錄) 저자 박정임(朴正林)
자료명(이칭) 淸齋朴先生忠節錄 저자(이칭) 朴正林(朝鮮) 等編
청구기호 K2-837 MF번호 MF35-1881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傳記類/別傳/一般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원문텍스트 이미지 장서각통합뷰어* 원문이미지 PDF

· 원문이미지

닫기
· K2-837:01
· K2-837:02

· PDF서비스

닫기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01(광무 5년)
· 청구기호 K2-837
· 마이크로필름 MF35-1881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박정임(朴正林) 등(等)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2.3 X 20.4
· 판본 목활자본(木活字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5.0×16.5cm
· 인장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단종의 충절인으로 알려진 淸齋 朴審問(1408~1456)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후손들이 1823년에 찬한 충절록 2책을 보완하고 요약하여 1901년에 1책으로 간행한 책이다.
서지사항
版心題는 ‘淸齋朴先生事蹟’, ‘淸齋朴先生行狀’, ‘淸齋朴先生家狀’, ‘淸齋朴先生墓誌’, ‘淸齋朴先生神道碑銘’, ‘上言回啓’ 등으로 내용에 따라 다양하다. 두 종류의 이본을 소장중인데, K2-837-1의 表紙書名은 ‘淸齋實記’, K2-837-2의 表紙書名은 ‘淸齋朴先生忠節錄’이다. 卷末의 重刊跋 기록을 통해 본서가 1901년(광무 5)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제 및 내용
1901년 후손인 淵璜泰均의 請에 의해 쓴 崔益鉉의 序가 권두에 있고, 이어 舊序로 裔孫인 淵昌이 原錄을 편간하면서 청해 받은 閔致庠(1825~1888)의 序, 原序에 해당하는 洪奭周의 序(1823, 순조 23)가 있다. 민치상의 서문은 그의 몰년에 비추어 보았을 때 1888년 이전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으로 淸齋公의 事蹟이 있다. 寧陽尉鄭悰家乘, 鄭惟吉 撰의 公之曾孫監役堰碑銘, 東史通攷, 公姪節度使大孫墓碣, 朝野奇聞, 東陽尉申翊聖言事錄, 尹淳撰의 五代孫毅烈公諡狀, 家狀 등에서 발췌하여 수록한 것이다. 다음으로 金祖淳이 지은 行狀, 박심문의 방손인 朴奎淳이 지은 家狀, 洪良浩가 지은 墓誌, 李容元이 지은 神道碑銘(倂序) 등이 있다.
다음으로 敎旨가 수록되어 있는데, 1804년(순조 4) 元陵 幸行時 嗣孫 景雲이 올린 上言과 備邊司의 回啓를 거쳐 吏曹參判 贈職敎旨가 내려지기까지의 관계 공문, 1828년(순조 28) 五道 幼學 李台鉉 등이 朴審問彰節祠에 追配할 것을 청하는 上言과 大臣의 논의를 거쳐 시행되기까지의 관계 공문, 監司 李紀淵의 江原監營往覆禮曹關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祝文으로 寧越府使 閔鼎秀가 지은 配享時告由祝文, 江原監司 李紀淵이 지은 奉安祝文, 節享祝文, 配享時獻官 등이 실려 있다. 이어 贈職과 贈諡에 관련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金炳學이 지은 諡狀과 증시의망단자(忠貞, 忠肅, 貞節), 1871년(고종 8) 내려진 忠貞의 贈謚敎旨 등이 있다. 충정의 諡註는 ‘事君盡節曰忠 淸白自守曰貞’이다.
이어 忠臣壇位次(附 朝士壇位次, 左·右別壇位次), 祠院錄(忠淸道 公州 表忠祠全羅道 海南 省山祠), 1876년(고종 13) 趙忠熙 製進의 彰節祠致祭文, 奉朝賀 金履翼 등 66人의 詞律 등이 있다.
그 다음은 14세손인 英鎬가 從姪인 淵禹를 통해 습득한 박심문의 手墨인 答金尙書 및 詩二首에 대한 李承輔의 簡牒序(英鎬의 跋文이 附)와 그 手墨인 簡牒, 1434년(세종 16) 박심문이 撰한 副提學公墓表(심문의 父인 剛生), 끝으로 朴正林의 청에 의해 奇宇萬1901년에 쓴 忠節錄重刊跋이 있다.
靑齋는 박심문의 호이다. 본관은 密陽이고, 자는 愼叔이며, 아버지는 剛生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司醞署 直長이 되었고, 1436년(세종 18)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였다. 記注官으로 있다가 함길도 절도사 金宗瑞가 육진을 개척할 때 그 從事官이 되었다. 1447년평안도 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448년道體察使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 때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成三問·河緯地 등과 왕래하면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세조 2) 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 일찍이 세종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의 顧命을 받았다.
한편 실록에는 1448년(세종 30)도체찰사 종사관 박심문평안도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죽으니, 관과 斂襲 제구를 내려 주고, 역마로 屍樞를 傳送하게 하였다는 기사와 1455년(세조 1)교리 박심문을 원종공신 3등에 녹훈한 기사 등이 보여 실기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또한 『고종실록』에는 1871년(고종 8) 3월 16일에 증 이조판서 박심문忠貞公으로 추증한 기사와 1905년(고종 42) 2월 2일 宮內府協辦 朴鏞和의 상소에 근거하여 掌隷院에서 覆奏함으로써 端宗 때의 충신 忠貞公 박심문에게 특별히 신주를 옮기지 않는 은전을 시행하라고 명한 기사 등이 보인다.
특성 및 가치
조선 초기의 충절인 박심문을 조선 후기에 후손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추숭했는지 알려 주는 자료이다. 본 충절록은 1823년에 찬한 충절록 2책을 보완하고 요약하여 1901년에 1책으로 편간한 것이다. 다시 1923년에는 목판의 『淸齋先生實紀』 2책이 편찬되었다.

집필자

임선빈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