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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가장(趙公家狀)

자료명 조공가장(趙公家狀) 저자 조만영(趙萬永)
자료명(이칭) 趙公家狀 저자(이칭) 趙萬永(朝鮮) 編
청구기호 K2-818 MF번호 MF35-1891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傳記類/別傳/一般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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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801
· 청구기호 K2-818
· 마이크로필름 MF35-1891
· 기록시기 1801~1834年(純祖年間)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조만영(趙萬永)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9.0 X 26.3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인장 藏書閣印,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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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永湖 趙曮(1719~1777)의 생애를 정리한 가장이다.
서지사항
서명은 表紙書名에 근거하였다. 표지는 卍字文이며, 五針眼으로 線裝되었다. 본문은 괘선이 없는 종이에 淨書하였는데, 종이를 긁어내어 수정한 부분도 있다. 전체적으로 습기로 인해 원형으로 얼룩진 부분이 보인다.
체제 및 내용
손자 趙萬永(1776~1846)이 지은 家狀이다. 언제 지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1835년(헌종 1)에 건립된 「趙曮神道碑銘」(奎10115)이 있다. 이는 영의정 南公轍이 짓고 廣州留守 金履載가 글씨를 쓰고 이조판서 金在昌이 전액을 쓴 것이다. 남공철이 신도비문을 지을 당시 이미 조엄의 생애를 정리한 가장 및 행장 등이 있었을 것이므로 찬자의 나이를 고려할 때 순조 연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엄은 문장에 능하고 經史에 밝았지만 민생을 도모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예컨대 1758년(영조 34)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 昌原馬山倉, 晋州駕山倉, 密陽三浪倉 등 漕倉을 설치하여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민폐를 크게 줄이고 국고 수입도 증대하게 하였다. 1763년(영조 39) 通信使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保藏法과 재배법을 보급하게 한 利用厚生은 높이 평가된다.
특성 및 가치
「趙曮神道碑銘」과 함께 조엄의 생애와 행적을 이해하는 데 기본 자료이다. 조엄의 저술로는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쓴 『海槎日記』가 있고, 편저로는 1760년(영조 36) 『豊壤趙氏世譜』가 있다. 그 외에도 손자 趙寅永의 문집 『雲石遺稿』에도 조엄에 관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어서 참고할 수 있다.

집필자

이동인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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