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숭정대부행예조판서이공시장(故崇政大夫行禮曹判書李公諡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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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 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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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시기 | 1899(광무 3년) |
· 청구기호 | K2-691 |
· 마이크로필름 | MF35-994 |
·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주체 - 인물
역할 | 인명 | 설명 | 생몰년 | 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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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순(徐正淳) 찬(撰) |
형태사항
· 크기(cm) | 42.8 X 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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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본 | 필사본(筆寫本) |
· 장정 | 선장(線裝) |
· 수량 | 1책(冊) |
· 판식 | 반곽(半郭) 30.7×20.4cm |
· 인장 |
藏書閣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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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정보
내용
정의
조선 말기의 문신 李寅命(1819~1887)의 諡號를 청하기 위해 1899년(광무 3) 2월에 徐正淳(1835~1908)이 지은 諡狀이다.서지사항
表紙書名은 ‘李公寅命諡狀’이다. 구 표지가 남아 있으며, 서명은 개장된 표지 서명과 같다. 제1면 우측 상단에는 ‘藏書閣印’이 날인되어 있다. 본문은 흑색 필사 인찰공책지에 淨書하였다.체제 및 내용
이인명은 조선 철종과 고종 때의 문신이다. 자는 祈永이고, 본관은 全州이며, 世宗의 다섯째 아들 廣平大君의 15세손이다. 1819년(순조 19) 11월 18일 龍宮縣監 一淵에게서 태어나 9세에 文貞公 穆淵(1785~1854)에게 입양되었다. 1858년(철종 9)에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역임하고 관직이 崇政大夫 禮曹判書까지 이르렀다. 1887년(고종 24) 12월 7일에 考終하였다.이 諡狀은 이인명의 큰아들 啓夏의 부탁을 받아 서정순이 1899년(광무 3) 2월에 撰述한 것이다. 구성은 여타의 시장과 다르지 않아, ‘가계 - 평생의 이력 - 配位와 子孫 - 삶의 종합적인 평가’의 순서로 짜여 있다. 시장에 따르면 이인명은 가정에서는 남다른 孝行을 하였고, 관리로서는 원칙을 중시하고 일 처리를 公正하게 했으며, 행동이 謹愼하고 淸儉했다고 한다. 효행에 관해서는 1848년(철종 14)에 아버지가 귀양지에서 서울로 移送될 때 陪從하고 겨울이었음에도 義禁府 앞에서 엎드려 떠나지 않은 일, 아버지가 평소에 가까이하지 않던 사람은 高官이거나 자신을 천거한 이라도 가까이하지 않았던 일 등이 제시되어 있다. 관리로서의 업적으로는 1862년(철종 13)에 경상우도 암행어사로서 晉州民亂을 진압하고 탐관오리를 벌한 일, 청나라에 사신으로 두 번 다녀오면서 기생과 음악을 불러 연회를 즐기거나 遊覽을 하지 않은 일, 監試官으로서 공정하게 科擧를 주관한 일, 1884년(고종 21)에 고종이 衣服制度를 바꾸려 하자 禮曹判書로서 극력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갔던 일 등이 중요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인명은 1910년(융희 4) 7월 26일에 ‘孝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특성 및 가치
조선 말기에 문신으로 활동했던 이인명의 삶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참고문헌
집필자
이태희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