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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효종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영릉지문(朝鮮國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寧陵誌文)

자료명 조선국효종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영릉지문(朝鮮國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寧陵誌文) 저자 송시열(조선)(宋時烈(朝鮮)), 송준길(조선)(宋浚吉(朝鮮)), 유이승(조선)(柳以升(朝鮮)) 서사(書寫)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06 MF번호 MF35-4082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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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2-5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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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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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659(현종 즉위년)
· 청구기호 K2-5206
· 마이크로필름 MF35-4082
· 기록시기 1659~1673年(顯宗卽位~14)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가치정보 귀중본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송시열(宋時烈) 찬(撰)

형태사항

· 크기(cm) 21.8 X 15.8
· 판본 필사판(筆寫板)
· 장정 도판(陶板)
· 수량 3점(點)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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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조선 17대 국왕 孝宗(1619~1659)의 능묘에 묻은 陵誌石이다.
서지사항
 寧陵의 誌石이며 같은 碑文이 3部 있다. 서명은 비문의 권수제인 ‘朝鮮國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寧陵誌文’을 따랐다. 서명은 四周雙邊의 첨지에 인쇄하여 碑文 뒷면에 붙여놓았다. 誌文은 총 1면이며, 10行18字로 필사하였다. 격자법을 적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체제 및 내용
 조선 17대 국왕 孝宗의 능묘에 묻은 陵誌石이다. 지석의 문장은 1659년 宋時烈(1607~1689)이 찬하고, 원지석의 글씨는 宋浚吉(1606~ 1672)이 쓰고, 천장 때는 柳以升(1638~?)이 썼다. 송시열이 찬한 寧陵誌文의 전체를 보면, 제목을 제외한 본문의 글자수만 3,301자이다. 본 지석에는 134자가 적힌 하나만 남아 있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해보면 묘지석이 총 20개 정도가 있어야 한다. 천릉을 하면서 송시열이 지은 별도의 追記도 다른 돌에 따로 새기지 않고 같은 형태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지석의 개수는 이보다 조금 더 상회할 것으로 유추된다. 본 지석은 총 3점으로 처음에 만든 원지석 1점과 1673년 천릉을 하면서 추가로 만든 2점이다.
 『승정원일기』 1673년(현종 14) 7월 5일 기사에 顯宗이 신하들과 영릉의 지석에 대해 논의한 것이 남아 있어 참고할 만하다. 첫째로 지석의 개수에 대해서는 金壽興의 대답에 총 3,300여 자에 23~24장이 된다고 언급하였다. 둘째, 閔維重이 언급한 지석을 보관하는 함에 대해 현종이 먼저 木櫃를 설치하고 石函에 담도록 지시하였다. 아울러 두 행으로 짝을 삼아 중첩해서 쌓도록 하였다. 여러 논의 끝에 얇은 나무판으로 궤를 만들고, 지석을 띠로 묶고 그 빈 공간은 모래를 채우게 하였다.
 셋째, 글씨는 사자관인 李益新이 한 건을 쓰고, 공조판서 李正英에게 한 건을 쓰게 하였다. 이후에 어람하고 그 취사선택을 하겠다고 하였다. 磁器로 만드는 지석은 回回靑을 사용하여 쓰는데 필사 경험이 없는 사람은 붓 머리가 크게 퍼지므로 잘 쓸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경험이 있어 노련한 이익신을 추천한 것이다. 그러나 추후의 기록을 보면 여러 사람의 글씨를 검사하여 결국 司猛 柳以升이 글씨를 썼다.
 넷째, 지석의 재료는 천릉을 할 때 石材와 燔造한 磁器 지석을 동시에 쓰는 것은 禮文에 없으므로 동일하게 석재보다 좋은 자기로 통일하자고 하였다. 아울러 강화도의 석재 운반에 탈이 생겨 내수사의 흠이 있는 것을 연마하여 썼다는 기록도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당시 석재 지석도 같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지석의 글씨를 쓰는 재료는 石間朱와 回回靑을 사용하는데, 석간주는 본래 붉은색이므로 구운 뒤에 검은색을 띠고, 회회청은 본래 검은색인데 구우면 파란색을 띤다고 하였다. 석간주는 구운 후에 상태가 좋을지 나쁠지를 지켜봐야 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어 본 지석에는 회회청을 사용하여 글씨를 썼다.
 효종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으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간 인물이다. 타국에서 9년의 고생 끝에 겨우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효종은 북벌론을 내세워 송시열과 함께하면서 독대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송시열은 능지문에 효종의 과거 사정과 그 생각을 잘 반영해놓았다. 장서각 소장 『寧陵誌狀』(K2-666)에는 영릉과 관련한 의례문들이 모두 등록되어 있다. 효종의 행장은 白軒 李景奭이 지었다.
특성 및 가치
 영릉의 지석은 석재와 자기 두 가지 모두 다 만든 것으로 보인다. 본 지석은 원래 지석과 천릉 때 만든 것으로 모두 자기로 만든 것들이다. 당시 석재 지석의 제작과 운반에 따른 폐단이 생겨나서 제작이 편한 자기로 지석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본 지석은 왕실에서 자기로 만든 최초의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김세진, 「朝鮮時代 磁器製 誌石의 變化와 特徵」, 『美術史學硏究』 제271·272호, 한국미술사학회, 2011.KCI

집필자

박경수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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