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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등본(書啓謄本)

자료명 서계등본(書啓謄本) 저자 예조(禮曹) 편(編)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143 MF번호 MF35-4082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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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821(순조 21년)
· 청구기호 K2-5143
· 마이크로필름 MF35-4082
· 기록시기 1821~1827年(純祖 21~27)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예조(禮曹)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4.0 X 22.4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가철장(假綴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19.1×14.1㎝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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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821년(순조 21)부터 1827년(순조 27) 사이에 예조에서 올린 서계를 모아놓은 등본이다.
서지사항
 표지서명은 ‘書啓謄本’이며, 四周雙邊의 洋紙 제첨지에 인쇄하였다. 표지는 백색의 洋紙이고 종이끈으로 고정시켜 假綴裝으로 장정하였다. 본문의 판식은 四周單邊, 上內向黑魚尾, 有界의 묵색 인찰공책지에 10行20字로 필사하였다. 책수는 1冊 24張이고, 종이는 楮紙이다. 제1장은 충해를 입은 흔적이 있다.
체제 및 내용
 본 문서는 1821년부터 1827년 사이에 예조에서 올린 서계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모아놓은 책이다. 문서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내용은 健陵의 遷奉과 관련하여 조정 신하들이 올린 書啓이다. 健陵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비 孝懿王后를 합장한 무덤이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면서 陵號가 健陵으로 정해지고 陵域이 조성되었다. 이후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건릉에 합장하는 일이 논의되었다. 이때 순조의 장인이던 領敦寧府事 金祖淳이 선왕의 건릉이 길한 곳이 아니라며 다시 길지를 택할 것을 건의하면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김조순이 올린 상소에 제기된 건릉의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산기슭의 기세가 약하여 웅장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없으니 주세의 강약은 논할 것조차 없고, 묘역이 높은 것은 오로지 보충해 쌓은 것이므로 질고 습하여 사철 내내 마르지 않는다. 혈도도 잘못되었으며, 좌청룡과 우백호가 갖추어지지 않고, 案山도 바르지 않다. 禿城이 높이 솟아 바위가 쫑긋쫑긋 서 있고, 넓은 들판이 바로 연결되고 큰 시내가 바로 흘러 달아나니 역량의 온전함이 없다. 능의 잔디가 항상 무너져 줄어드는 것과 습한 곳에서 벌레가 생기어 서식하는 것도 문제이다. 밖으로 나타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다면 능 안에 숨겨져 볼 수 없는 것은 또한 더욱 심각할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에 순조는 대비께서 평소에 이 일을 크게 걱정하시어 자신에게 누차 하교하셨는데, 김조순의 상소를 보니 목이 메어 송구함을 견딜 수 없다 하며 이장의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때 예조에서 정리한 내용이 이 문서이다. 또 다른 내용은 서얼 허통과 관련한 문제, 종묘의 犧牲에 관한 변통 논의 등이 실렸다. 이처럼 본 문서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 당시 조선에서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들이었다. 이 문서에는 각 사안들의 상세한 논의 과정은 수록하지 않았으며, 국왕이 최종적으로 결정한 날에 예조에서 올린 서계와 그 결정 내용만을 실었다.
특성 및 가치
 1820년대 조정에서 다루어진 중요한 논의와 처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관련한 연대기 사료와 함께 대조해서 분석한다면 당시 정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집필자

임성수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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