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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친왕신도비명(興親王神道碑銘)

자료명 흥친왕신도비명(興親王神道碑銘) 저자 김윤식(金允植)
자료명(이칭) 興親王神道碑銘 저자(이칭) 金允植 撰 ; , 편자미상(編者未詳)
청구기호 K2-5109 MF번호 MF35-6690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金石類/碑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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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19
· 청구기호 K2-5109
· 마이크로필름 MF35-6690
· 기록시기 1919年 以後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김윤식(金允植) 찬(撰)

형태사항

· 크기(cm) 38.0 X 24.8
· 판본 척인본(拓印本)
· 장정 첩장(帖裝)
· 수량 1첩(帖)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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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919년 5월 興親王 李載冕(1845~1912)의 묘소에 세워진 神道碑의 비문을 탁본하여 첩장한 것이다.
서지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는 花唐草紋이 있는 청색 비단이고 折疊하는 형태로 제작한 帖本이다. 표지서명은 ‘興親王神道碑銘’이고, 백색 비단의 첨지에 묵서하여 표지 좌측 상단에 붙여놓았다. 拓印本으로 본문 내용은 興親王神道碑文이며, 책수는 48折 24張이고, 종이는 楮紙이다. 본문 3·4면에 金允植이 撰하고, 尹用求가 書하고, 金聲根이 篆書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체제 및 내용
 흥친왕 이재면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군인으로, 興宣大院君의 嫡長子이자 고종의 친형이며 永宣君 李埈鎔의 아버지이다. 대한제국 성립 후 完興君에 책봉되었다가 1910년 흥친왕으로 진봉되었다.
 1874년(고종 11) 11월 이후 흥선대원군고종민비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 이준용을 추대하려고 4회의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이재면고종에게 냉대를 받았고, 1899년(광무 2) 사도세자가 ‘莊宗’으로 추존된 뒤 황제의 친형이었음에도 4대 승습에 따른 작위를 받지 못하였다. 1907년(융희 1) 완흥군에 책봉되었고, 1910년(융희 4) 8월 흥친왕으로 진봉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공작으로 강등되었다. 처음 이름은 載錄, 자는 武卿, 호는 又石이고, 나중에 개명하여 李熹로도 알려져 있다.
 1912년 67세를 일기로 雲峴宮에서 병사하였고, 처음에는 경기도 김포군에 시신이 안장되었다가 1921년 9월 양주군으로 이장되었다. 신도비는 1919년 5월에 세워졌는데, 초창기에는 ‘이희공전하 신도비명’이라고 세웠지만, 훗날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1948년 신도비를 다시 세울 때는 ‘흥친왕 신도비’로 제목 세 글자가 바뀌어 세워졌다.
 본서의 표제는 ‘興親王神道碑銘’이라고 되어 있고 본문에 가계와 행적, 銘이 기록되어 있다. ‘興親王神道碑銘 幷序’라고 시작하는 비문은 구한말 대신으로 中樞院 議長, 奎章閣 大提學 등을 지낸 金允植(1835~1922)이 지었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吏曹 判書 尹用求(1853~1939)가 썼으며, 전액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이조 판서 金聲根(1835~1919)이 한 것이다.
특성 및 가치
 본서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흥친왕의 추숭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유용한 문서이자, 일제강점기 李王家 인물에 대한 의례 적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흥친왕고종흥선대원군 사이에서 정치적 줄타기를 하며 고종과 대립하고, 후에 그의 아들이 고종의 대안자로 지목되기도 하는 등 한국 근대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서 연구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璿源系譜記略
朝鮮王朝實錄
연갑수, 『고종대 정치 변동 연구』, 일지사, 2008.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집필자

김동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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