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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빈묘표지명(御製宜嬪墓表誌銘)

자료명 어제의빈묘표지명(御製宜嬪墓表誌銘) 저자 편자미상(編者未詳)
자료명(이칭) 御製宜嬪墓表誌銘 저자(이칭) [編者未詳]
청구기호 K2-5102 MF번호 MF35-6690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金石類/碑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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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786(정조 10년)
· 청구기호 K2-5102
· 마이크로필름 MF35-6690
· 기록시기 1786年(正祖 10) 以後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편자미상(編者未詳)

형태사항

· 크기(cm) 46.2 X 32.5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철장(鐵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33.7×27.4㎝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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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조선 제22대 국왕 正祖의 후궁 宜嬪 成氏(1753~1786)의 墓表와 墓碣銘이다.
서지사항
 표지서명은 ‘御製宜嬪墓表誌銘’이다. 표제는 주색 단변의 백색 비단 제첨에 묵서하였고, 표제 우측 상단에 백색 비단 첨지를 부첨하여 ‘墓表’, ‘墓誌銘’을 필사하였다. 표지는 雲紋이 있는 녹색 비단이고, 5침안의 鐵裝으로 장정하였다. 본문의 판식은 四周雙邊, 無魚尾의 朱絲欄에 12行22字로 필사하였다. 책수는 1책 12장이고, 종이는 壯紙이다.
체제 및 내용
 의빈 성씨의 본관은 창녕이다. 정조의 첫 번째 후궁으로 文孝世子(1782~1786)의 생모이다. 어릴 때 궁으로 들어와 혜경궁의 궁인으로 있었다. 정조의 눈에 들어 1782년(정조 6) 왕자를 낳아 昭容에 봉해졌다. 이듬해 宜嬪이 되었고 1784년(정조 8) 소생 왕자가 문효세자에 책봉되었다. 1784년(정조 8)에 옹주를 낳았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가 홍역을 앓다가 죽었고, 같은 해 셋째 아이가 복중에 있을 때 의빈 성씨가 사망하였다.
 정조는 평소 의빈 성씨를 총애하였다. 의빈 성씨가 죽자 손수 墓表와 墓誌銘의 문장을 지었다. 본 『御製宜嬪墓表誌銘』은 정조가 지은 의빈 성씨의 묘표와 묘지명의 원고이다. 묘표와 묘지명에 죽은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다. 정조는 두 글에서 의빈 성씨의 생애를 돌아보며 추억한 뒤 世系를 밝혔다. 일반적으로 묘표는 피장자의 간략한 이력과 세계를 밝히지만, 정조의 어제는 다소 긴 문장으로 비문을 꾸몄다.
 현재 전하는 『宜嬪成氏墓表』의 前面大字는 英祖의 駙馬이자 당대 명필로 이름 높았던 錦城尉 박명원이 썼으며, 陰記는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徐龍輔가 썼다. 비석은 1786년 11월에 세워졌다.
특성 및 가치
 조선에서 배우자를 위해 비석의 문장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을 위한 비문일 경우 어머니나 일족의 여성 어른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왕실에서도 역시 드문 일로 海昌尉 吳泰周가 부인인 明安公主를 위해 비석을 세웠으며, 영조和順翁主를 위해 어필로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정조의빈 성씨를 위해 묘표와 묘지명을 지은 것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의빈 성씨의 묘표는 국왕이 글을 짓고 당대 명필로 이름 높던 이들이 글씨를 쓴 것으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든 경우이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正祖實錄
한신대학교 박물관 편, 『조선이 사랑한 글씨-조선 500년 명필·명비』, 신구문화사, 2013.

집필자

김충현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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