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선희궁춘추분제축식(宣禧宮春秋分祭祝式)

자료명 선희궁춘추분제축식(宣禧宮春秋分祭祝式) 저자 편자미상(編者未詳)
자료명(이칭) 宣禧宮春秋分祭祝式 저자(이칭) [編者未詳]
청구기호 K2-5046 MF번호 MF35-6682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典禮/殿·宮·廟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원문텍스트 이미지 장서각통합뷰어* 원문이미지 디지털아카이브 PDF

· 원문이미지

닫기

· PDF서비스

닫기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26
· 청구기호 K2-5046
· 마이크로필름 MF35-6682
· 기록시기 1926年 以後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편자미상(編者未詳)

형태사항

· 크기(cm) 33.4 X 23.8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5.4×18.2㎝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1926년 이후 暎嬪 李氏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宣禧宮에서 春秋分祭에 쓰인 축식을 수록한 책이다.
서지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수제는 ‘宣禧宮春秋分祭祝式’이다. 분홍색 표지의 線裝本이다. 표지에 표지서명을 비롯하여 별다른 기록이 없다. 본문의 필사에 四周雙邊 朱絲欄, 10行, 無魚尾의 그려서 만든 空冊紙를 사용하였다. 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 제2행의 ‘維昭和某年歲次’라는 글을 통해 일본 연호인 昭和年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1926년 이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된 책으로 『宣禧宮仲朔準祝冊』(K2-5045)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별도의 서문이나 목차 없이 축식만 기재되어 있다. 선희궁에 모셔진 사람은 영빈 이씨(1696~1764)로, 英祖의 후궁이자 思悼世子의 생모이다. 본관은 全義로, 아버지는 贈贊成 李楡蕃이며, 어머니는 漢陽金氏이다. 어려서 입궁하여 1726년(영조 2) 30세에 승은을 입으면서 아이를 갖게 되어 淑儀에 책봉되었고, 1728년(영조 4) 貴人이 되었으며 1730년(영조 6) ‘暎嬪’으로 봉해졌다. 후일 사도세자가 되는 元子와 옹주 5명을 낳았다. 사망했을 때 영조는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 지냈으며, 이듬해 ‘義烈’이라는 諡號를 내릴 때 그 의식을 친히 집행하였다. 1899년(光武 3) 사도세자가 ‘莊祖’로 추존되자 墓가 園으로 승격되며, 綏慶園의 원호를 받았고, 시호 ‘昭裕’가 더해졌다. 선희궁영빈 이씨가 죽은 1764년 ‘義烈廟’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며, 1788년(正祖 12) 선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70년(고종 7) 한때 毓祥宮에 합했다가 1896년에 되돌려졌으나, 1908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지금도 당시의 궁터가 신교동에 남아 있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七宮 안에 위치해 있다.
 축식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의 연호인 소화 이외에 연월일, 국왕의 諱 등을 모두 ‘某’로 표기하거나 비워두고 있다. 이를 통해 본 서적의 축식이 실제로 春秋分祭에서 사용되기 전에 用例로 만든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純宗實錄』을 살펴보면, 1908년 7월 23일 기사에 개정한 제사제도에 대한 칙령이 기재되어 있는데, 여기서 선희궁은 1년에 2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의 칙령 이후로 선희궁에 대한 제사를 춘추분제로 지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성 및 가치
 본서에서는 축문의 主祭者를 ‘王 諱 謹遣’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는 관련 서적인 『宣禧宮仲朔準祝冊』(K2-5045)에서 ‘皇帝’로 기재하였던 것과 비교해볼 때 국권 상실 이후 이왕가로 격하된 국왕의 권위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본서는 국가 제사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격하된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집필자

권석창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