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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씨문적(諸氏文蹟)

자료명 제씨문적(諸氏文蹟) 저자 편자미상(編者未詳)
자료명(이칭) 諸氏文蹟 저자(이칭) [編者未詳]
청구기호 K2-4987 MF번호 MF35-6676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傳記類/叢傳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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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777
· 청구기호 K2-4987
· 마이크로필름 MF35-6676
· 기록시기 1777~1800年(正祖年間)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편자미상(編者未詳)

형태사항

· 크기(cm) 24.5 X 17.6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가철장(假綴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19.7×14.8㎝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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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정조 연간에 忠壯公 諸沫의 墓表·墓碣과 그의 사적에 관련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서지사항
 표지서명은 ‘諸氏文蹟’이고 표지에 직접 묵서하였다. 표지는 미색의 楮紙이고, 紙釘으로 고정한 假綴裝으로 장정하였다. 표지 裏面에 ‘忠壯公墓表, 贈參判公墓碣, 先親墓表, 伏請’이라 필사하였다. 본문은 四周單邊, 上內向二葉花紋魚尾, 有界, 10行의 묵색 인찰공책지에 필사하였다. 책수는 1冊 13張이고, 종이는 楮紙를 사용하였다.
체제 및 내용
 諸沫의 본관은 漆原이고, 출신지는 固城, 시호는 ‘忠壯公’이다. 제말은 임진왜란 시기 의병을 일으켜 웅천·김해·정암 등지에서 대승하였다. 전쟁 기간에 그는 전공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승진하여 主簿가 되었고, 그 뒤 銓曹에서 이를 전해 듣고 성주목사에 제수하였다. 조정 대신들도 兵使에 의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의 빠른 승진에 대해 일부에서 수문장을 하다가 한번 잘 싸워 목사가 되었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정에서도 워낙 많은 軍功이 올라오다 보니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고 포상하여 공평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 중에는 제말이 사실은 한 번도 큰 싸움을 하지 않았는데, 헛된 칭찬만 받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계속 의병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고, 성주에서 전사하였다. 1792년(정조 16) 정조는 임진왜란 전공자들을 추증하면서 제말增兵曹判書로 증직하였고, ‘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조카 諸弘祿도 벼슬을 추증하였다. 또한 정조제말의 연고지에 旌表하는 비석을 세워 오랫동안 그의 충의를 기리도록 하였다. 『정조실록』에는 1792년에 그가 ‘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1795년(정조 19) 기사에는 ‘忠壯公’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이후 기록에도 모두 ‘충장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중간에 시호가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정에서는 그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서울의 군영에서 급료를 주고 활쏘기를 가르쳐 과거시험을 보게 하는 등 예우를 다하였다.
 본서에는 이와 같은 제말의 군공을 정리한 기록들을 모아놓았다. 우의정 沈象奎가 작성한 ‘忠壯諸公墓誌銘’에는 그의 인적사항과 생애, 전공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봉조하 南公轍이 쓴 ‘增兵曹判書諸公行狀’에도 그의 전투 일지와 전사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고, 1792년에 시호를 내리고 ‘增兵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로 증직한 경위를 설명하였다. 대제학 洪奭周가 쓴 ‘增統制使諸公墓誌銘’도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제말의 공적과 충의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다.
특성 및 가치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의 활동과 전후 추숭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집필자

임성수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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