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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사략(莊陵史略)

자료명 장릉사략(莊陵史略) 저자 함기성(咸基成)
자료명(이칭) 莊陵史略 저자(이칭) 咸基成編
청구기호 K2-495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地理類/古蹟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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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53
· 청구기호 K2-4951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함기성(咸基成)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24.4 X 16.0
· 판본 유인본(油印本)
· 장정 반양장(半洋裝)
· 수량 1책(冊)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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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953년 영월군수 함기성端宗의 생애와 중종 연간부터 숙종 연간까지 追復된 과정을 편찬한 자료이다.
서지사항
 油印本 서적으로, 무늬가 없는 황색 종이 표지에 서명이 있으며, 표지 서명 우측의 나뭇잎 모양 안에 ‘謹呈’이 인쇄되어 있다. 양장 제본 형식이며, 판심제와 장차 표시가 없다. 광곽과 계선 등이 없으며, 1면에 13行20字로 되어 있고, 총 42면이다.
체제 및 내용
 권두 서문에서 함기성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영월단종 사적이 흔적조차 사라질 위기에 이르고 영월의 중요한 읍지나 『장릉지』 같은 사료가 병화에 모두 소실되어 그 진장을 찾아낼 수 없음을 우려하던 중에 『莊陵史略』 1권을 입수하여 이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본문의 맨 앞에서 王統繼序圖를 통해 제1대 태조부터 26대 순종에 이어 이왕 李垠에 이르는 왕통의 계서를 밝혔고, 제4대 세종의 경우는 별도로 장자 문종, 세조, 안평대군, 금성대군문종의 아들 단종대왕 부분에 ‘莊陵在寧越’이라 밝혔다.
 이어서 1441년 세종의 元孫으로 단종이 탄강한 사실과 집현전 학사 36인 중 14명의 이름을 밝히고 단종의 생애를 기록하였다. 1452년 문종의 승하 이후 즉위하여 재위 3년 만에 수양대군에게 禪位하고 태상왕의 존위에 올랐으며, 1455년(세조 1)성삼문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를 모의한 것이 발각된 大臣의 變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 서강 청령포에 안치되었다. 이후 객사 東軒으로 移御하였는데, 1457년 금성대군의 변으로 10월 14일 관풍헌에서 나이 17세에 승하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追復되었으며, 묘지는 영월에 있는 莊陵이다.
 이후부터 1453년(단종 1)의 기록에서는 세종이 원손을 집현전 학사들에게 부탁하여 학사들이 단종 보위에 성심을 다했던 것과 그해 10월 안평대군 이용강화에서 사망하고 사육신 황보인, 김종서가 모두 피살당한 계유정란의 정황이 자세하다. 1455년 6월 수양대군에게 전위한 뒤 창덕궁으로 移御하고 태상왕이 된 경위를 기록하였다. 1446년 태상왕이 금성대군의 유가로 출궁하고, 성삼문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를 도모한 것이 발각되어 추국받고 사형당하는 장면이 상세하며, 이후 세조집현전을 혁파하고 소장 서적은 예문관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해 6월 18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군에 안치되고, 금성대군순흥부에 유배되었다. 1447년 금성대군순흥부사 이보흠단종의 복위를 모의한 것이 발각되어 금성대군安東獄에 갇히고, 9월에 노산군은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10월에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에 이른 후부터 단종의 최후와 10월 24일 시인과 궁녀 90여 명이 영월군의 동쪽 금강 암벽 위에서 투신한 상황을 상세히 적었다.
 다음은 단종의 복위 과정을 차례로 기록하였다. 1516년(중종 11) 노산묘에 봉심하고 치제문을 보내어 지방관 4명에게 節行祭를 하게 하였고, 이때부터 1698년(숙종 24)까지 관원을 파견하여 치제한 것이 90차례에 이르렀다. 1521년(중종 16) 노산군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가 82세로 승하하여 대군 부인의 예로 장례 지냈다. 1580년(선조 13) 노산묘에 석물, 상석, 품석, 장명등, 망주석 등 입석을 갖추게 하였고, 1585년(선조 18) 감사 정곤수영월군수가 묘 아래에 祭廳과 齋室을 세웠다. 1610년(광해군 2) 祠宇를 세우고 부인 송씨를 배향하였다. 1681년(숙종 7)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추봉하고, 1694년 彰節祠에 사액한 후 김시습, 남효온, 朴審問 3위를 追配하였다. 1698년 노산대군을 왕으로 추복하고 묘호를 ‘端宗’이라 하고, 능을 ‘莊陵’이라 하였다. 또한 부인 송씨를 왕비로 추복하고, 시호를 ‘定順王后’, 능호를 ‘思陵’이라 하여 태묘에 祔廟하였다.
 권미의 부기에 장릉, 숙종대왕의 어제, 端廟의 영조대왕 비문, 영월읍 객사 동대청인 관풍헌, 금강정 板上의 曹夏望詩, 영월 객사 동쪽 자규루, 李玉峰詩, 朝仕壇, 軍政壇, 女人壇 등 창절의인의 配食壇인 충신단, 영월읍 동구의 彰節祠, 영월읍 동강 낙화암 위의 愍忠祠, 장릉 火巢口 내의 禁夢庵, 영월읍 주산 아래 永慕殿에 대한 설명이 있다.
특성 및 가치
 端宗영월 장릉 및 그의 사적에 관해 기록한 대표적 사료로, 『莊陵誌』, 『莊陵史補』와 함께 참조할 수 있다. 또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莊陵事略』(奎7780)은 단종의 사후 1681년(숙종 7) 大君에 追封되고 1698년(숙종 24) 復位되고 廟號가 追贈되었으며 이후에 英祖正祖端宗과 癸酉靖亂 이후 희생된 충신들을 彰義한 전말을 기술한 사료이다.

참고문헌

莊陵事略』(奎7780)

집필자

정은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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