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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헌귀비애책문(純獻貴妃哀冊文)

자료명 순헌귀비애책문(純獻貴妃哀冊文) 저자 제술자미상(製述者未詳)
자료명(이칭) 純獻貴妃哀冊文 저자(이칭) [製述者未詳]
청구기호 K2-4939 MF번호 MF35-4083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金石類/冊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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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11
· 청구기호 K2-4939
· 마이크로필름 MF35-4083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제술자미상(製述者未詳)

형태사항

· 크기(cm) 28.2 X 14.3
· 판본 척인본(拓印本)
· 장정 첩장(帖裝)
· 수량 1첩(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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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911년 6월 純獻貴妃(1854~1911)를 永徽園에 안치하면서 작성된 哀冊文의 탁본첩이다.
서지사항
 표지 장황은 斜格卍字紋 살구색 종이에 서명이 필사되지 않은 무늬가 있는 비단 표지제첨이 있다. 제첨의 주위로 붉은색 비단을 덧대었다. 본문은 음각으로 2面이며, 8行19字이다. 병풍식으로 절첩한 책의 표지와 書背를 하나의 종이로 덮어 싸고 글자가 적히지 않은 뒷면을 풀로 붙여 제본한 선풍장 형태이다.
체제 및 내용
 순헌귀비고종의 후궁으로 ‘嚴貴妃’라고 불렸다. 明成皇后를 가까이서 모시다가 고종 승은을 입자 황후의 질투로 1885년(고종 22)에 궁 밖으로 쫓겨났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바로 고종의 부름을 받아 재입궁하였고, 1896년(건양 1)에 행해진 俄館播遷 때 고종을 모셨다. 1897년(광무 1) 아들 李垠을 낳아 황제로부터 ‘善英’이라는 이름을 받고 ‘貴人’에 책봉되었고, 뒤이어 ‘純妃’, 다시 ‘純獻貴妃’로 책봉되어 ‘純獻皇貴妃’라는 칭호를 받고 慶善宮에서 살았다. 한일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德壽宮 卽阼堂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본서는 ‘황귀비’의 시호를 올린 뒤 영휘원에 안치한 애책문을 탁본한 첩이다. 표제는 제첨지가 있으나 아무 글씨도 쓰여 있지 않다. 또한 일반적인 애책문의 경우 애책문의 製述官과 書寫官의 이름을 새겨놓는데, 본서에는 제술관과 서사관의 정보가 없다.
 본문의 내용은 1911년 순헌귀비의 임종 이후로부터 시작되며, 시호로 올린 ‘純獻’에 대해 한 글자씩 설명하고 있다.
특성 및 가치
 본서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순헌귀비의 추숭 과정을 밝히는 데 유용한 문서이자, 일제강점기 李王家 인물에 대한 의례 적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시기 禮葬의 진행 과정에 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의 『純獻貴妃禮葬儀軌』(K2-2980)에 정리되어 있다. 또한 장서각 소장으로 동일 서명의 애책문(K2-4938)이 있는데, 그보다 먼저 나온 것으로 보이며 내용이 더 소략하다. 차이점은 임종일이 윤6월로 되어 있는데, 연대기 자료에 나와 있는 엄귀비의 임종일은 양력 날짜로 순종 4년 7월 20일이다. 이를 음력으로 환산하면 1911년 6월 25일로 윤달이 아니라 평달에 해당한다. 고종 32년(1895) 9월부터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본 애책문의 날짜는 오류로 보인다. 나중에 작성된 애책문(K2-4938)에는 6월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변원림, 『조선의 왕후』, 일지사, 2006.
연갑수, 『고종대 정치변동 연구』, 일지사, 2008.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집필자

김동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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