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한승상제갈충무후묘비명(漢丞相諸葛忠武候廟碑銘)

자료명 한승상제갈충무후묘비명(漢丞相諸葛忠武候廟碑銘) 저자 이민숙(李敏叔), 김수증(金壽增)
자료명(이칭) 漢丞相諸葛忠武候墓碑銘 , 한승상제갈충무후묘비명(漢丞相諸葛忠武候墓碑銘) 저자(이칭) 李敏叔(1633 - 1688) 奉敎撰; , 이민숙(1633-1688) 봉교찬; e김수증(조선,1624-1701)봉교서(李敏叔(1633-1688) 奉敎撰; e金壽增(조선,1624-1701)奉敎書)
청구기호 K2-4935 MF번호 MF35-4083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金石類/碑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원문텍스트 이미지 장서각통합뷰어* 원문이미지 디지털아카이브 PDF

· 원문이미지

닫기

· PDF서비스

닫기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686(숙종 12년)
· 청구기호 K2-4935
· 마이크로필름 MF35-4083
· 기록시기 1686年(肅宗 12) 以後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민숙(李敏叔) 봉교찬(奉敎撰)

형태사항

· 크기(cm) 41.4 X 28.0
· 판본 척인본(拓印本)
· 장정 선풍장(旋風裝)
· 수량 1첩(帖)
· 인장 藏書閣印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1686년(숙종 12)에 왕의 전교를 받들어  丞相諸葛亮(181~234)의 사당을 중건하고 碑를 세웠는데, 이 비문을 拓本한 첩이다.
서지사항
 표지 장황은 문양이 없는 살구색 종이에 ‘武侯碑銘’을 필사한 題籤이 있다. 제첨은 황색 종이에 원형의 연화무늬가 있는데, 표지 종이 재질과 문양, 색 등을 보면 원표지에 기록된 서명 부분을 잘라 제첨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은 음각으로 총 14면이다. 음기는 총 1면으로 3行3字씩, 본문은 13면으로 6行10字씩 잘라 붙여 첩으로 만들었다. 병풍식으로 절첩한 책의 표지와 書背를 하나의 종이로 덮어 싸고 글자가 적히지 않은 뒷면을 풀로 붙여 제본한 선풍장 형태이다. 제1면에 ‘藏書閣印’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본서에는 표제와 비문의 내용을 탁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에 ‘武侯碑銘’이라고 적혀 있다.
 제갈량의 자는 ‘孔明’이고, 시호는 ‘忠武侯’이며, 瑯琊郡 陽都縣에서 태어났다. 중국 삼국시대 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이다. 명성이 높아 ‘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劉備를 도와 吳나라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曹操의 대군을 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荊州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이 碑는 1686년숙종이 명하여 平安道 永柔縣武侯의 사당을 중건하고 세운 것으로, 李敏敍(1633~1688)가 비문을 撰하고, 金壽增(1624~1701)이 글씨를 썼다. 일찍이 1592년(선조 25) 宣祖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던 무렵 영유현에서 御駕를 머물렀는데, 그곳의 지명이 ‘臥龍’인 것으로 인하여 무후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나중에 사당이 허물어지자 현종 때 다시 중건하게 하였지만 시행되지 않았는데, 숙종평안도관찰사 李世白이 狀啓를 올려 비로소 시행된 것이다. 선조의 遺志를 계승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평안도 지역의 인재들을 분발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특성 및 가치
 본서는 조선에서 행해진 관우 신앙과 더불어 국내에서 중국의 위인을 숭배하던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선조 대에 제갈량의 사당 및 관우의 사당이 설립되고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바, 이를 통해 국난 극복의 의지와 명나라에 대한 절대적 신뢰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朝鮮王朝實錄

집필자

김동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