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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군소민공신도비명(恩信君昭愍公神道碑銘)

자료명 은신군소민공신도비명(恩信君昭愍公神道碑銘) 저자 정조(正祖)
자료명(이칭) 恩信君昭愍公神道碑銘 저자(이칭) 正祖(朝鮮王)製 , 정조(조선왕,1752-1800) 제(正祖(朝鮮王,1752-1800) 製)
청구기호 K2-4928 MF번호 MF35-4083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金石類/碑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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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779(정조 3년)
· 청구기호 K2-4928
· 마이크로필름 MF35-4083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정조(正祖) 어제(御製)

형태사항

· 크기(cm) 37.7 X 23.8
· 판본 척인본(拓印本)
· 장정 첩장(帖裝)
· 수량 1첩(帖)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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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정조의 이복동생인 恩信君 李禛에게 ‘昭愍’이라는 시호를 증직한 1779년(정조 3) 이후 세워진 신도비를 拓本한 첩이다.
서지사항
 총 1冊으로 구성되어 있고, 표제는 ‘恩信君昭愍公神道碑銘’을 직접 묵서하였다. 표지는 무늬가 없는 갈색이고, 折疊하는 형태로 제작한 帖本이다. 본문은 碑文을 楮紙에 拓印하여 붙였다. 책수는 22折 12張이고, 자수는 3行6字이다. 제1면은 좌측 여백에 표제를 필사하였으며, 충해를 입은 흔적들이 다른 면보다 다수 보이고 있다.
체제 및 내용
 본서에는 표제와 비문의 4면을 탁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에 ‘恩信君昭愍公神道碑銘’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들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은신군 이진(1755~1771)은 莊獻世子와 후궁인 良娣 林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제 임씨1899년(광무 3)에 ‘肅嬪’으로 追封되었다. 그는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사후에 南延君이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興宣大院君의 조부가 된다. 1771년(영조 47) 앞서 영조를 충동질하여 장헌세자를 굶어죽게 한 金龜柱 일당의 무고로, 형인 恩彦君과 함께 관작을 박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어 죽었다. 1774년(영조 50)에 追復되고, 영조의 동생인 延齡君 李昍에게 嫡統으로 입적되었다.
 한 면에 4글자씩 크게 쓰인 글씨는 전서체로 ‘王孫恩信君禛昭愍公神道碑’라고 되어 있다. 뒤에는 한 면에 세로 3행, 가로 5열로 15글자씩 음각되어 있다. 품계는 承憲大夫로 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직으로 하였다. 후에 顯祿大夫로 加資된 것은 ‘昭愍’이라는 시호를 증직받은 1779년으로 보인다.
 이 비문은 정조의 친필로 작성된 것인데, 앞선 영조 대에 화를 입어 죽음에 이르게 된 그에 대한 애도와 회한의 내용이 담겨 있다. 다만 비문의 중간부터 마지막까지의 내용이 결락되어 있다. 결락된 부분은 장서각 소장본 「恩信君神道碑銘」(K2-4929)을 참조할 수 있다.
특성 및 가치
 본서는 조선 후기 ·정조 대 정치사 및 壬午禍變과 관련된 당시 정국 운영과 관련이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연령군-은신군-남연군-흥선대원군-고종’으로 이어지는 혈통의 승계는 조선 후기 왕위 정통성 문제와도 관련이 깊다.

참고문헌

璿源系譜記略
承政院日記
日省錄
正祖實錄
서울역사박물관 편,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서울역사박물관, 2007.

집필자

김동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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