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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헌종성황제경릉비문(大韓憲宗成皇帝景陵碑文)

자료명 대한헌종성황제경릉비문(大韓憲宗成皇帝景陵碑文) 저자 김학진(金鶴鎭)
자료명(이칭) 大韓憲宗成皇帝景陵碑文 저자(이칭) 김학진(1838-1917) 찬진(金鶴鎭(1838-1917) 撰進) , 金鶴鎭(1838 - 1917)撰進
청구기호 K2-4926 MF번호 MF35-4083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金石類/碑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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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08(융희 2년)
· 청구기호 K2-4926
· 마이크로필름 MF35-4083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김학진(金鶴鎭) 찬진(撰進)

형태사항

· 크기(cm) 44.4 X 26.2
· 판본 척인본(拓印本)
· 장정 첩장(帖裝)
· 수량 1첩(帖)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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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조선 제24대 국왕 憲宗의 무덤인 景陵에 세워진 陵碑를 拓本해 꾸민 첩이다.
서지사항
 총 1冊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뒤의 표지가 상실된 상태이고, 장정은 折疊하는 형태로 제작한 帖本이다. 본문은 碑文을 楮紙에 拓印하여 붙였으며, 책수는 24折 12張이다. 撰者書寫面에 ‘陰記撰進官從一品崇祿大夫奎章閣大提學 臣金鶴鎭’, ‘前後面書寫官從一品崇祿大夫奎章閣祗候官 臣尹用求’를 기록하였다.
체제 및 내용
 1897년 10월에 고종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후 莊祖[思悼世子正祖·純祖·翼宗[孝明世子]을 각각 황제로 추존하였다. 더불어 眞宗[孝章世子憲宗·哲宗 역시 추존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1908년(隆熙 2)純宗진종헌종·철종의 황제 추존을 추진하였다. 이에 永陵·景陵·睿陵에 陵幸하여 親祭를 한 뒤 각각 表石을 배설하였다.
 본 탁본은 헌종 경릉의 능표를 첩장으로 꾸민 것이다. 전면의 글씨는 篆書로 ‘大韓憲宗成皇帝景陵 孝顯成皇后祔左’라 하였다. 陰記는 단정한 해서로 헌종의 간략한 이력과 더불어 황제 추존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이에 덧붙여 헌종효현왕후 역시 이력과 황비 추존 사실을 기록하였다.
 음기의 문장은 金鶴鎭(1838~1917)이 작성하였다. 김학진은 본관은 안동, 자는 ‘聖天’, 호는 ‘後夢’이다. 1871년(고종 8) 문과에 급제한 뒤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당대 문장이 뛰어나기로 이름이 높았으므로 撰者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書者는 尹用求(1853~1939)로 본관은 海平, 자는 ‘周賓’, 호는 ‘石村’이다. 1871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해서와 행서에 능해 다양한 금석 글씨를 남겼다.
특성 및 가치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관련 금석문을 탁본하여 첩으로 제작하고 보관하였다. 『大韓憲宗成皇帝景陵碑文』은 이러한 왕실 전통이 대한제국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다만 채탁한 상태나 장황 등으로 미루어 御覽用이라기보다 보관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서각에 동일한 비석에 대한 탁본이 총 5종이 있는데, 족자 형태가 3종이며 첩장 형태가 2종이다. 족자는 비석의 형태와 더불어 당대 왕실의 장황을 잘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탁본첩은 조선 후기 서예사에 의미 있는 사료이다. 특히 왕실 관련의 금석자료는 편년을 파악하기 쉽고, 제작에 참여하는 인물이 당대에 문장과 글씨로 이름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大韓憲宗成皇帝景陵碑文』 역시 고종순종 때 유행하던 서체를 잘 보여주고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藏書閣所藏 拓本資料解題 I』, 韓國精神文化硏究院, 2004.
황정연, 「조선시대 능비의 건립과 어필비의 등장」, 『문화재』 42,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KCI

집필자

김충현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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