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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조공상경청덕휼민영세불망비문(觀察使趙公尙絅淸德恤民永世不忘碑文)

자료명 관찰사조공상경청덕휼민영세불망비문(觀察使趙公尙絅淸德恤民永世不忘碑文) 저자 저자미상(著者未詳)
자료명(이칭) 觀察使趙公尙絅淸德恤民永世不忘碑文 , 관찰사조공상경청덕휼민영세불망비문(觀察使趙公尙絅淸德恤民永世不忘碑文) 저자(이칭) [著者未詳]
청구기호 K2-4924 MF번호 MF35-4083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金石類/碑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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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727(영조 3년)
· 청구기호 K2-4924
· 마이크로필름 MF35-4083
· 기록시기 1727年(英祖 3) 以後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저자미상(著者未詳)

형태사항

· 크기(cm) 40.7 X 28.0
· 판본 척인본(拓印本)
· 장정 첩장(帖裝)
· 수량 1첩(帖)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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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27년(영조 3)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한 鶴塘 趙尙絅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碑를 拓本한 첩이다.
서지사항
 표지서명은 ‘豐碑’이고, 본문 첫 장의 서명이 ‘觀察使趙公尙絅淸德恤民永世不忘碑’이다. 표지 장황은 황색 종이에 斜格卍字 문양을 사용하였고, 호접장으로 장정해놓았다. 본문은 비문을 탁본해서 크기에 맞게 잘라 붙여놓은 것이다. 책의 장수는 2면 1책이다.
체제 및 내용
 본서에는 표제와 비문의 전면과 후면을 탁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에 ‘豐碑’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공덕을 찬양하는 비라는 뜻이다.
 조상경(1681~1746)의 본관은 豐壤이고 자는 ‘子章’, 호는 ‘鶴塘’이다. 金昌協의 문인으로, 1708년(숙종 34) 사마시를 거쳐 171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노론 계열이라 하여 안주에 유배되었다가 아산으로 이배되었다.
 1725년(영조 1) 유배에서 풀려나고, 1726년 10월 16일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727년 2월 함경도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임금께 狀請하여 田稅와 身布를 감하게 하였다. 같은 해 6월 그의 장청으로 인하여 北關 병사에게 조총을 다시 익히게 하였다. 앞서 1685년(숙종 11)에 조정에서 변경에 있는 백성의 사냥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조총을 모두 거두어들였는데, 이로 인해 민간에 조총이 없어 오랑캐의 방비에 소홀하게 되었으므로 조상경이 이와 같이 장청을 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7월 5일에는 司諫院 獻納에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9개월 남짓 함경도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는데, 비문의 전면에 ‘觀察使趙公尙絅淸德恤民永世不忘’이라 적혀 있다. 즉 관찰사조상경의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과 백성을 구휼한 선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후면에 ‘碑 按道一年澤及萬民 自南至北頌聲咸均 擁正五年十二月日居山道驛吏卒等 立’이라고 적혀 있다. 맨 앞의 ‘碑’는 전면에 자리가 없어서 후면에 기록한 것이다. 道를 다스리는 1년간 은택이 만민에게 미치고 남에서부터 북에 이르기까지 그의 공덕을 기리는 소리가 고르게 나왔다는 내용이다. 옹정 5년(1727, 영조 3) 12월에 함경도거산도 역리와 역졸 등이 세웠다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특성 및 가치
 본서는 조선 후기 북관 지역 및 지방 수령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연대기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실제 지방관의 공덕을 기린 비라는 점에서 지방 수령의 현양 사업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집필자

김동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