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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위시대만주도(後魏時代滿洲圖)

자료명 후위시대만주도(後魏時代滿洲圖) 저자 목기성정(木崎盛政)
자료명(이칭) 後魏時代滿洲圖: 저자(이칭) 木崎盛政(日本) 製圖
청구기호 K2-4627 MF번호 MF35-2913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地理類/地圖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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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00]
· 청구기호 K2-4627
· 마이크로필름 MF35-2913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목기성정(木崎盛政)(일본(日本)) 제도(製圖)

형태사항

· 크기(cm) 45.2 X 47.7
· 판본 신연활자판(新鉛活字版)
· 장정 접포장(摺鋪裝)
· 수량 1포(鋪)
· 판식 절(折) 18.5×15.3㎝
· 인장 李王家圖書之章, 洋裝圖書分類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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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滿洲歷史地理』의 편찬 과정 중 제작된 것으로, 後魏時代 만주 지역의 당시 행정구역 경계와 주요 지명을 기재한 역사지도이다.
서지사항
 표지 장황은 황색 종이에 斜格卍字 문양이 있으며, 종이로 된 제첨 위에 사주쌍변의 광곽을 그리고 ‘[滿洲歷代地/理附圖第六]後魏時代滿洲圖[附後燕時代滿洲圖北周國之東北部北齊之安州]’를 필사하였다. 가로 2절, 세로 3절로 된 접포식 장정이다. 사주쌍변의 광곽에 컬러 인쇄된 지도이며, 사주쌍변에 위도와 경도를 검은색 선으로 표시하고 있다. ‘後魏時代滿洲圖’라는 지도명과 ‘朱字ハ古名ナリ’라는 주기가 인쇄되어 있다. 『후위시대만주도』에는 각각 분도가 삽입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우측 상단에 「後魏時代滿洲北部」, 좌측 상단에 「北周國之東北部」가 삽입되어 있으며, 좌측 하단에 「後燕時代滿洲圖」가 삽입되어 있다. 광곽의 바깥쪽 하단부에 ‘木崎盛政製圖’라는 제도자에 대한 기록과 ‘縮尺=五百萬分之一’이라는 축척이 우측에서 좌측의 순서로 인쇄되어 있다. 지도 우측 상단에 ‘李王家圖書之章’과 ‘洋裝圖書分類’라는 인장이 날인되었다.
체제 및 내용
 ‘後魏時代滿洲圖’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한 장에 다섯 종류의 지도가 들어 있다. 「後魏時代滿洲圖」와 함께 그 우측 상단에 「後魏時代滿洲北部」 지도와 좌측 하단에 「後燕時代滿洲圖」, 좌측 상단에 「北周國之東北部」 지도, 그리고 이 지도의 상단에 「北齊之安州」라는 분도가 삽입되어 있다.
 19세기 말부터 일본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만주 지역이 본래 중원 왕조에서 독립된 지역이었음을 주장하는 자료를 수집하고 각종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후 만주의 역사와 지리를 독립적으로 다룬 일련의 결과물들을 내놓았는데, 그중 『滿洲歷史地理』와 함께 편찬된 附圖도 중요한 결과물이었다.
 장서각 소장의 『後魏時代滿洲圖』는 1폭 1책으로 되어 있으며, 황색 책 표지 좌측에 ‘滿洲歷代地理附圖第六 後魏時代滿洲圖’라고 지도명이 있고, 지도 안쪽 중간 부분 사각형 안에 지도명을 적고 그 아래 괄호에 ‘439-550’이라는 지도가 반영하는 시간적 범위를 표시하였다. 연도 아래 다섯 종류의 지도 부호에 대한 안내가 있다. 붉은색 ◎, ⊙, △는 각각 국도, 군치, 주치를 표시하고 있다. ++++++ 표시 위에 녹색 선은 후위의 강역을, ·-·-·-·-·-·- 표시 위에 녹색 선은 邊外 諸國의 강역을 표시하였다. 그 아래에 ‘붉은 글씨는 옛 지명이다’라는 주기가 적혀 있다.
 지도의 도곽선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외도곽과 내도곽 사이에 경도와 위도를 2도 간격으로 기재하였다. 이 지도는 북위 34도에서 46도, 동경 114도에서 132도 사이의 범위를 담고 있다. 이는 북으로 흑룡강눈강 유역, 남으로 전라남도를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 동으로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국경 부근부터 서로는 중국 북경 부근까지의 지역이다.
 축척은 중앙에 ‘縮尺=三百萬分之一’이라는 문자식 축척과 왼쪽에 중국척(支那里=里), 오른쪽에 미터법(吉米=km)으로 도표식 축척을 병기하고 있다. 옅은 갈색으로 농담을 조절하여 고도를 표현하고 있다. 주기의 내용대로 붉은색으로 後魏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검은색으로 지도가 제작될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바다와 호수는 녹색으로 채색하고, 하천은 푸른색 실선으로 표현하였다. 해안선의 변화가 있는 지역은 점선으로 현재의 해안선을 따로 표현하였다. 지도의 하단 맨 좌측에 ‘木崎盛政 製圖’라는 주기로 제작자의 이름을 기재하고 있다.
 後魏(386~534)는 386년 鮮卑族拓跋珪가 북방에 세운 나라이다. 남북조시기 북조의 첫 번째 왕조이기도 하다. 386년탁발규前秦이 사분오열된 틈을 타 스스로 ‘代王’이라고 칭하며 代國을 건국하고, 수도를 盛樂(현재 내몽고 呼和浩特)으로 정하였다. 같은 해 4월에 국호를 ‘魏’로 고쳤는데, 역사상 이를 ‘北魏’라고 하기도 하고 ‘後魏’라고 하기도 한다. 398년道武帝平城(산서 大同)으로 천도하고 제위에 올랐다. 지도의 시간적 배경의 시작점인 439년太武帝가 북방을 통일한 해이다. 493년 孝文帝는 수도를 洛陽으로 옮기고 대거 개혁을 시작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534년西魏東魏로 분열되고, 서위가 멸망하여 北周로, 동위가 멸망하여 北齊가 세워졌다.
 후위는 초창기를 제외하고 지도에 표현된 대로 중국의 동북 지역에 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녹색 실선으로 표현된 후위의 국경선은 서쪽에서 장성을 따라 이어지다가 遵化 북쪽에서 북동 방향으로 平川, 朝陽 등을 거쳐 연결되며 다시 남하하여 遼河 하류 서안에서 고구려와 마주하며 끝난다. 한편 거란고구려의 국경선은 요하를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며 요하동요하서요하로 갈라지는 곳에서 동요하를 따라 북상하여 송화강까지 연결된다. 이처럼 후위 시대의 동북 지역은 고구려거란을 비롯한 북방 민족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적색으로 표시한 후위시대의 지명에는 國名, 州名, 郡名, 民族名 등이 있다. 국명과 민족명은 구분하지 않고 붉은색으로 高句麗, 百濟, 新羅, 任那, 勿吉, 契丹, 庫莫奚 등을 표시하였다. 이미 없어진 夫餘, 沃沮, 濊貊 등은 가는 글씨체로 표시하고 있다. 고지명 중에서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어려운 것에는 물음표를 덧붙였다. 이 지도에서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에 물음표를 덧붙였다. 백제의 수도 사비공주를 동일한 곳으로 표기하는 오류가 있다.
 「後燕時代滿洲圖」는 後燕시대의 만주 상황을 담은 지도이다. 16국시기에 해당하는 384년에 선비족 慕容垂河南省 滎陽에서 ‘燕王’이라 칭하고 後燕을 건국하였다. 수도는 中山(河北省 定州)에 정하였다. 후에 용성(요녕성 조양)으로 천도하였다. 전성기 때는 하북, 산동요녕, 산서, 하남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409년북연으로 대체되었다.
 이 지도는 「후위시대만주도」와 마찬가지로 제목 아래 괄호에 ‘384-409’라는 지도가 담고 있는 시기를 표시하였고, 그 밑에 다섯 종류의 범례와 ‘붉은 글씨는 옛 지명이다’라는 주기가 있다. 도곽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외도곽과 내도곽 사이에 경위도를 적었는데 북위 37도에서 44도, 동경 116도에서 131도 사이를 범위로 하고 있다. 외도각 바깥 하단에 축척이 표시되어 있다. 축척은 중앙에 ‘縮尺=五百萬分之一’이라는 문자식 축척과 왼쪽에 중국척(支那里=里), 오른쪽에 미터법(吉米=km)으로 도표식 축척을 병기하고 있다. 지도에서 후연의 영역에 幽州, 平州의 두 주와 그에 속하는 북평, 창려, 요동, 현도, 요서 등의 군 명칭을 기재하였으며, 후연의 영역 밖에 고구려, 읍루, 부여 등을 표시하였다.
 「後魏時代滿洲北部」는 후위시대 만주 북부 지방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제목 아래 괄호에 ‘439-550’이라는 지도가 담고 있는 시기를 표시하였고, 그 밑에 다섯 종류의 범례와 ‘붉은 글씨는 옛 지명이다’라는 주기가 있다. 도곽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외도곽과 내도곽 사이에 경위도를 적었는데, 북위 42도에서 53도, 동경 114도에서 137도까지를 범위로 하고 있다. 외도곽 바깥 하단에 ‘縮尺=一千二百萬分之一’이라는 문자식 축척과 그 아래에 支那里와 吉米의 도표식 축척을 병기하고 있다.
 이 지역은 대부분 현재 흑룡강성에 속하는데, 지도에 豆莫婁, 失韋, 地豆于, 勿吉, 契丹, 烏洛候 등의 위치를 비정하고 주요 하천의 옛 이름을 기재하였다.
 「北周國之東北部」는 북주 동북부 지역의 상황을 나타낸 지도이다. 西魏恭帝 3년(556)서위 정권을 실제로 장악하던 宇文泰가 죽은 후, 아들 宇文覺이 大冢宰를 이어받아 스스로 ‘周公’이라고 불렀다. 다음해 초에 공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周’로 정하고 수도를 장안으로 정했다. 역사상 이를 ‘북주’라고 한다. 북주武帝북제를 멸망시키고 577년 북방을 통일했는데, 581년 楊堅이 선위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隋’로 바꾸면서 북주가 멸망하게 된다. 북주의 북방 통일은 중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로 평가받고 있다. 북주의 북방 통일이 바로 가 이룬 남북조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북주는 북방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다른 북조 국가와 마찬가지로 동북 지역에는 요서 지방에만 진출하였을 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 지도는 제목 아래에 연도 표시 없이 축척만 표시하였다. ‘縮尺=四百萬分之一’이라는 문자식 축척과 왼쪽에 중국척을 병기하였다. 이 지도는 북위 39도에서 43도, 동경 116도에서 122도 사이의 범위를 표현하고 있다. 즉 현재의 하북성 동부와 요녕성 서부의 북주시대 지명을 보여주고 있다. 幽州, 玄州, 平州, 營州 등 주와 소속 縣들이 표시되어 있다.
 「北齊之安州」 지도는 축척이 120만 분의 일이다. 북제550년 高洋東魏를 멸하고 건국한 나라로, 577년 북주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 지도는 북제 시기 安州 일대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安樂郡, 燕樂縣, 密雲縣 등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현재 북경의 북서쪽 일대 지역에 해당한다.
 20세기 초 상황으로 조선,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과 함께 조선의 道와 중국의 省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으며, 조선중국 주요 도시의 위치와 명칭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하천과 바다의 명칭도 기록되어 있다.
특성 및 가치
 본 지도를 통해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 여러 나라의 동북 지역 상황을 알 수 있다. 남북조시대의 중국 동북 지역은 요서요동의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북조 왕조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지도를 통해서도 해당 시기 중국의 동북 지역은 고구려와 북방 민족이 그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남북조시대와 20세기 초 중국 동북 지역의 상황을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이다. 또 1900년일본의 역사지도 제작 수준을 알 수 있으며,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사전에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였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만주 일대에 대한 조사·연구를 담당하고 이를 통해 전체적인 개발까지 주도한 기관이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참고문헌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 中國地圖出版社, 1982.
王育民, 『中國歷史地理槪論』, 人民敎育出版社, 1988.
中國歷史大辭典·歷史地理』, 上海辭書出版社, 1997.

집필자

이명희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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