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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고읍(厚州古邑)

자료명 후주고읍(厚州古邑) 저자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 편(編)
자료명(이칭) 厚州古邑: 저자(이칭) 陸地測量部 編
청구기호 K2-4597 MF번호 MF35-4087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地理類/地圖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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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12
· 청구기호 K2-4597
· 마이크로필름 MF35-4087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7.6 X 50.5
· 판본 신연활자판(新鉛活字版)
· 장정 접포(摺鋪)
· 수량 5포(鋪)
· 판식 절(折) 15.0×14.2㎝
· 인장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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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일본육지측량부厚州古邑을 포함해 그 일대를 총 다섯 개의 도엽으로 제작한 1:50,000 지형도이다.
서지사항
 표지 장황은 황색 종이에 斜格卍字 문양이 있다. 흰 종이 제첨 위에 四周雙邊의 광곽을 인쇄하고 ‘平安北道 厚州古邑’을 필사하고, 제1책은 ‘厚州’, 제2책은 ‘上洞口’, 제3책은 ‘富山洞’, 제4책은 ‘洞口’, 제5책은 ‘田地嶺’을 필사하였다. 가로 2절, 세로 3절로 된 접포식 장정이다. 사주쌍변의 광곽에 흑백 인쇄된 지도이며, 제1책 厚州古邑 지도를 중심으로 서술하면, 광곽의 상단 중앙에 ‘厚州古邑’을, 좌측 하단에 ‘陸地測量部’를 기록하고, 그 좌측으로 ‘明治四十五年三月十日印刷同三月十五日發行’, ‘著作權所有印刷兼發行者 陸地測量部’를 인쇄하였다. 광곽 하단부 중앙에 ‘五萬分一之尺’이 있으며, 광곽 우측 상단에는 ‘朝鮮五萬分一圖’가, 하단에는 ‘圖式ハ明治三十三年式地形圖圖式ニ準ス(該圖式ニ揭ケサル記號ハ本圖ノ欄外ニ於テ之ヲ示ス)’가 인쇄되어 있다. 지도에 ‘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다섯 개의 도엽은 厚州, 上洞口, 富山洞, 洞口, 田地嶺이다. 厚州古邑鴨綠江厚州川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전통적으로 평안북도 후창군에 속해 있었으며,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획 체계에서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에 속한다. 1830년에 쌓은 읍성의 터가 남아 있다. 1870년 후창으로 읍성을 옮기기 전까지 이곳이 읍성으로 사용되었다. 장서각 소장의 지도에도 읍성 터가 표시되어 있다.
 각각의 지도 최상단 중앙에 지도의 해당 지역명이 표기되어 있다. 지도의 도곽선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지도의 외도곽선 우측 바깥쪽에 ‘略圖’라고 표시되어 있고, 그 왼쪽에 작은 글씨로 ‘朝鮮五萬分一圖’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그 위쪽에 ‘李王家圖書之章’ 인장이 찍혀 있다. ‘朝鮮五萬分一圖’ 표시 아래에 소장자가 후에 표시한 것으로 생각되는 도엽번호가 ‘후주고읍 ○호’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다. 외도곽선 바깥쪽 우측 하단에 ‘이 지도는 明治 33년식(1900년) 지형도 도식에 준하여 처리되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좌측 하단에 지도의 발행 연도가 明治 45년(1912년)이며, 저작권 소유 및 인쇄·발행자가 육지측량부라고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좌측 하단에 지도의 부호로 도계와 군계 두 개만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지도 하단 외도곽선 바깥쪽 중앙에 구축척을 ‘五萬分一之尺’이라고 한자로 표시하고, 그 아래에 왼쪽부터 차례로 ‘米突(미터법)’, ‘朝鮮里’, ‘日本里’가 도표척도식 축척법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내외도곽선 사이 중앙에는 인접하고 있는 지역명을 표시했다.
 수록되어 있는 다섯 개의 도엽은 모두 육지측량부에 의해 1900년 도식에 준하여 처리되었으며, 발행일의 경우 도엽마다 몇 개월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1912년에 발행되었다. 厚州田地嶺 도엽은 1912년(明治 45) 3월에 발행되었으며, 富山洞洞口의 도엽은 1912년 12월에 발행되었다. 上洞口 도엽은 발행일이 삭제되어 있다.
 일본1890년대부터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하고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지도를 제작하였는데,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주도로 제작된 한반도의 1:50,000 지형도는 그 제작 시기와 측량 수준에 따라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차 시기는 한일강제병합 이전에 제작된 ‘약도’로, 장서각 소장의 『厚州古邑』에 수록된 다섯 개의 도엽이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2차 시기는 한일강제병합 직후에 제1차로 제작된 약도를 수정·보완한 것으로 ‘지형도’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제3차 시기는 삼각측량에 의해 정식으로 제작된 지형도로 전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도’라 한다.
 장서각 소장 『厚州古邑』이 포함된 지도가 제작된 시기는 제1차 시기로, ‘朝鮮略圖’라 칭하며 지도의 우측 상단에 ‘略圖’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약도는 明治 28년식(1895)明治 33년식(1900년) 도식에 준하여 처리되었기 때문에, 한일강제병합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약도의 경우, 제3차 시기에 제작된 1:50,000 지형도를 모아 경인문화사에서 영인 간행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와 비교해보면, 측량 방식이 간단한 측량기구와 목측술에 의존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정확도와 정교함이 떨어진다. 그리고 제3차 시기에 제작된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측도일과 난외주기가 제1차 시기에 제작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 『후주고읍』과 같이 제1차 시기에 제작된 지도들은 한일병합 이전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의 한반도 상황을 보여주는 유일한 지형도라 할 수 있다. 지도의 지명 표기는 당시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었던 한자 지명이 사용되었고, 한자에는 일본어의 외래어 표기인 가타카나가 병기되었다.
 본 지도의 다섯 개 도엽은, 1996년 성지문화사에서 영인·간행한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1:50,000에 수록된 도엽과 지도상에 표시된 지리적 형태 및 내용, 지도의 제작 방법과 관련하여 축척과 도식, 지도의 발행일까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판본으로 생각된다. 다만 차이점은 장서각 소장본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색인도가 영인·간행본 도엽에는 표시되어 있으며, 발행일이 삭제되어 있던 上洞口 도엽의 발행일이 1912년(明治 45) 3월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장서각본의 경우 도엽 우측에 제작 이후에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번호가, 성지문화사 출판본에서는 도엽마다 구역별로 1~16까지의 번호로 표시되어 있으나,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장서각본 중 첫 번째 도엽인 厚州古邑이 영인본에서는 ‘厚昌 8’로 되어 있으며 장서각본의 두 번째와 네 번째, 다섯 번째 도엽인 上洞口, 洞口, 田地嶺은 ‘長津 1’, ‘長津 9’, ‘長津 5’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서각본의 세 번째 도엽인 富山洞은 ‘慈城 2’로 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차이점을 보이는 이유는, 厚州古邑의 경우 소장자의 편의를 위해 후주고읍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묶어 하나의 첩으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성지문화사 출판본의 경우에 제1차 시기에 제작된 총 484개의 도엽을 배열한 뒤에 지도를 효율적으로 보관하거나 필요한 지도를 쉽게 찾기 위해 도엽번호와 같은 의미로 부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성 및 가치
 본 지도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 일제의 우리나라 지도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의 한반도 상황을 보여주는 유일한 지형도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평안북도 지역의 연구와 지명의 변천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圖書韓國本解題-地理類 3』,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양보경, 「지도의 근대와 전근대」, 『문화역사지리학회 심포지엄-근대와 지리』, 2005.
이용석,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근대 지형도의 성격과 활용」, 『생활문물연구』 7, 2002.

집필자

이명희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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