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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일기(江北日記)

자료명 강북일기(江北日記) 저자 최종범(崔宗範), 김태흥(金泰興), 임석근(林碩根)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 崔宗範(朝鮮) 等記
청구기호 K2-4510 MF번호 MF35-696
유형분류 고서/일기 주제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일기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전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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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872(고종 9년)
· 청구기호 K2-4510
· 마이크로필름 MF35-696
· 기록시기 1872年(高宗 9) 以後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최종범(崔宗範)

형태사항

· 크기(cm) 29.4 X 23.0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인장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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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872년(고종 9) 평안감사의 官令으로 崔宗範 등 3인을 간도 지역에 파견하여 청인과 조선인의 취락 상태를 조사하여 관에 보고한 기록이다.
서지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와 권수제는 ‘江北日記’이다. 황색 표지의 線裝本으로, 斜格卍字 문양이 있다. 표지의 좌측 상단에 표제가 기재되어 있다. 본문의 필사에는 無郭, 無絲欄, 無版心의 楮紙를 사용하였다. 앞표지 이면에 저자가 다닌 길을 표시한 채색 지도가 붙어 있다. 본문 가운데 잘못 기재한 부분을 잘라내고 뒤에 종이를 덧붙여 수정한 흔적이 있다. 본문 첫 장 우측 상단에 ‘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다. 작성 시기는 본문 중 ‘本國自甲子以後益致泰山之安連値大有民皆樂生安業且其揚花玉鷄之說亦歸鳥有則以君才德何樂於此 而手把秊鋤肯作此化外之民乎’라는 기록을 통해 갑자년에 즉위한 高宗 대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고 이 일기가 壬申年의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이를 종합해 볼 때 1872년(고종 9) 이후로 추정된다.
체제 및 내용
 본서의 맨 앞에는 접포 형식의 노정도 1폭이 있는데, 지형 위에 최종범 일행이 거쳐간 노정을 붉은 선으로 자세히 표시하였다. 지도의 주기에 路數와 行路를 그려서 先春嶺의 前後를 기준으로 頭道溝 아래에서 唐河까지 조선 지경을 넘은 行過處를 보여주고, 三頭江 아래부터 初頭江까지 形便과 里程을 張淳의 말에 의거하여 그렸다고 기록하였다. 실제 지도의 노정에 후평면 금창리 일대에서 압록강을 건너 金汝玉家를 거쳐 高麗城 다음으로 統巡通使가 출입하는 길을 지나 暴濤川과 金鍊之家를 거쳐 四頭江의 張淳家까지 조사하고, 다시 始頭河의 李成允家와 大營의 李德禧家에 이르고, 東臺洞 許亘家를 거쳐 다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온 것을 표시하였다.
 1872년 官令으로 崔宗範, 金泰興, 林碩根 3인을 그곳에 파견하여 1871년 겨울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 杜芝洞의 對岸인 七道溝金昌里의 대안인 馬鹿浦 등지의 조선인의 취락 현황을 조사하여 6월 1일 압록강 도강 후부터 7월 10일까지 날짜별로 기록하여 관에 보고하였다.
 최종범 등을 현지에 파견한 것은, 1872년 6월 盛京禮部의 자문 중에 1871년 10월에 厚昌의 匪賊들이 杜芝洞·金昌里 등지에서 소요를 일으켰는데 內地의 어느 곳과 가장 가까이 인접해 있는가를 즉각 조사해서 상세히 회신하여 이 사건을 처리하는 자료로 삼을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평안감영에서 行會하여 후창 변경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때 비적들이 모였던 곳의 지명을 탐문하여 6월 10일 조정에 1차 보고하였다. 본서는 1차 보고에 그치지 않고 간도 지역 조선인의 거주 실태를 자세히 파악하여 올린 보고서라 할 수 있다.
 본서에 의하면, 최종범 일행은 6월 1일 도강한 후 7월 10일까지 압록강을 경계로 동북으로는 湯河, 서북으로는 渾河에 이르는 일명 간도 지역을 정탐하였다. 최종범 등이 도강을 하면서 휴대한 물품 중에 식량은 미숫가루, 화폐는 조선 동전과 금, 선물용으로 청심환·蘇合元·韓紙, 답사와 기록을 위해 나침반과 필묵을 소지하였다.
 정탐 사실은 주로 간도 거주 조선인과 청국인의 호구·생활상, 越境한 조선인의 潛越 연유와 출신지, 진인도래설의 진위 등을 조사하는 것 등이다. 간주에 거주한 조선인들은 대개 무산 출신으로 월경 이유는 가난과 폭정으로 인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삶은 청국인에게 고용되어 노예처럼 부려지거나 마적에게 약탈당하여 궁핍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최종범후창 출신으로 左寨將이었고, 김태흥은 급제 출신의 防將이었으며, 임석근은 중국어 통역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공식적 기록에 이들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간도 지역의 정탐을 목적으로 비밀리에 파견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자료는 7월 11일 최종범 등 3인이 현지에서 돌아왔으나, 최종범김태흥이 갑자기 오한으로 4일 동안 크게 아파 7월 15일에야 비로소 관에 보고되었다.
특성 및 가치
 본서는 1872년간도 지역에 형성된 조선 이주민 사회의 실태를 파악한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현전하는 『강북일기』는 장서각, 규장각(古4850-3) 등에 있는데, 이들 두 판본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작자 미상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강북일기』 1책(B6B 11)이 1927년에 필사되어 전하는데, 후에 초록한 것으로 간주된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제130책, 고종 9년 6월 10일(계해)
이왕무, 「조선 후기 『강북일기』에 나타난 만주지역 인식」, 『북방사논총』 4호, 동북아역사재단, 2005.

집필자

정은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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