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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공전하신도비명(李埈公殿下神道碑銘)

자료명 이준공전하신도비명(李埈公殿下神道碑銘) 저자 김윤식(金允植), 윤용구(尹用求), 김성근(金聲根)
자료명(이칭) 이준공전하신도비문(李埈公殿下神道碑文) , 李埈公殿下神道碑銘 저자(이칭) 金允植(朝鮮) 撰; , 이준용(李埈鎔)|김윤식(金允植)|윤용구(尹用求)|김성근(金聲根)|미상
청구기호 K2-3982 MF번호 MF16-311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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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19
· 청구기호 K2-3982
· 마이크로필름 MF16-311
· 기록시기 1919年 以後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김윤식(金允植) 찬(撰)

형태사항

· 크기(cm) 37.0 X 23.4
· 판본 탁인판(拓印版)
· 장정 첩장(帖裝)
· 수량 1책(冊)
· 인장 藏書閣印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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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 皇族인 李埈의 신도비를 탁본하여 첩장한 것이다.
서지사항
표제는 ‘李埈公殿下神道碑文’이다. 不分卷 1帖으로 표지는 나무판을 사용하였고, 裝幀은 折帖裝이나 書背를 푸른 비단으로 고정시킨 형태이다. 서명은 비단으로 만든 제첨 위에 필사하였으며 25折로 구성되어 있고, 종이는 두꺼운 楮紙를 사용하였다. 본문은 板式이 없는 拓印本으로, 비의 前面은 2行 2字, 陰記는 7行 10~11字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 첫 장 상단에 정방형의 ‘藏書閣印’을 날인하였고, 표지 ‘西紀一九七三年六月藏書閣再裝’이란 스탬프를 날인하였다.
체제 및 내용
흥선대원군의 적손인 이준의 신도비를 첩장한 것으로, 신도비는 金允植(1835~1922)이 찬술하고 尹用求(1853~1939)가 썼으며, 題額은 金聲根(1835~1919)이 썼다. 김윤식이 신도비문을 찬술하게 된 이유는 이준과 20여 년간 世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내용은 먼저 제액인 ‘李埈公殿下神道碑銘’을 제시한 뒤에 이어 비문의 찬자 등을 기록하고 이준의 가계와 사환 경력, 그리고 정치적 활동 등을 서술하였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준(1870~1917)은 初諱가 李埈鎔이고 자는 景極이며, 호는 石庭이다. 아버지는 李憙/火公이고 할아버지가 흥선대원군, 증조가 南延君, 고조가 隆陵, 즉 사도세자의 別子인 恩信君이며, 어머니는 풍산 홍씨 洪秉周의 딸이고 계모가 여흥 이씨 李麟九의 딸이다. 이준1870년(고종 7) 서울운현궁에서 출생, 음서로 동몽교관에 진출한 뒤 홍문관 정자, 예문관 검열, 규장각 대교, 세자시강원 설서, 홍문관 부응교, 남학 교수를 비롯해 승정원 동부승지, 형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종정경, 종친부 공사당상, 예조 참의와 친군통위사, 특파일본보빙대신과 주차일본전권공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895년(고종 32)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20여 일간 수감되었다가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에 특지로 감면을 받아 10년 定配刑을 받고는 교동에 유배되었다. 비문에서는 이때의 옥사를 구체적으로 적지 않았는데, 당시 군국기무처의원인 金鶴羽 암살사건을 비롯해 朴泳孝, 徐光範 등 친일파 내각대신들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解配된 뒤 서용되어 중추원 1등의관을 지냈고 명성황후 국휼 때 宗戚執事와 지문서사관으로 차출되었다.
1897년 일본영국 등지를 돌아본 뒤에 동경으로 돌아와 거처하였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비문에서는 ‘國事犯’들이 모두 도쿄에 모여 본국의 정세에 대해 ‘忼慨憂歎’하였으나 이준은 홀로 두문불출하고 손님을 사양했으며, 조정의 득실을 말하지 않았고 이 와중에 발생한 흥선대원군(1820~1898)의 상에도 奔哭하지 않았다고 하여 신중한 처신을 기록하였다.
동경에서 13년을 머문 뒤 1907년에 귀국한 후 永宣君에 봉해지면서 1등에 서훈되었고 太極章을 수여받았으며,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육군참장에 임명되면서 大勳位에 서훈되고 이화장을 수여받았다. 11월에는 부친 李載冕일본국 보빙대사로 파견되자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일본에서 旭日章을 수여하였고, 1912년에는 ‘李埈公’으로 봉해졌다. 1917년 2월 29일 사망하였다. 사망 후 아들이 없어 李堈公의 둘째 아들인 李鍝가 양자가 되었다. 비문의 마지막에서 찬자는 이준에 대해 부귀와 安樂의 가운데서 태어났으나 우환과 곤고의 세월 속에 성장했다고 하였다.
특성 및 가치
 본서는 황족인 이준의 생애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고종 연간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격동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도 참고가 된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장서각소장 탁본자료해제Ⅱ』, 2005.

집필자

이근호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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