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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략교정청의궤(璿源譜略校正廳儀軌)

자료명 선원보략교정청의궤(璿源譜略校正廳儀軌) 저자 종부시교정청(宗簿寺校正廳) 편(編)
자료명(이칭) 선원보략수정시교정청의궤(璿源譜略修正時校正廳儀軌) , 璿源譜略修正時校正廳儀軌 저자(이칭) 종부시(조선) 편(宗簿寺(朝鮮) 編) , 宗簿寺(朝鮮) 編
청구기호 K2-3845 MF번호 MF35-543, 981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其他/璿源存案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원문텍스트 디지털아카이브 이미지 디지털아카이브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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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734(영조 10년)
· 청구기호 K2-3845
· 마이크로필름 MF35-543, 981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종부시교정청(宗簿寺校正廳)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47.7 X 29.3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40.0×23.2cm
· 인장 宗簿寺印,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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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34년(영조 10) 7월 11일 종부시제조 宋寅明의 啓辭로 『선원보략』을 수정하고, 『列聖八高祖圖』를 처음 작성하게 된 과정을 수록한 의궤이다.
서지사항
卷首題는 ‘璿源譜略修正時校正廳儀軌’이다. 표제와 書根題도 동일하다. 표지 서명 우측에 ‘英宗’, ‘乙卯年’, ‘赤裳山上件’이라는 기록이 있다. 표지 장황은 연화와 보상화 당초 등의 무늬가 있는 황색 종이로 하였다. 종이는 楮紙를 사용하였으며 본문은 四周雙邊에 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의 판식을 가진 木板 印札空冊紙에 12行으로 墨書하였다. 제1면에 ‘李王家圖書之章’과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이 날인되어 있으며, 본문에는 ‘宗簿寺印’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영조1721년(경종 1)에 王世弟로 책봉된 이후 신축환국과 임인옥사를 겪고 1724년(경종 4)에 즉위하였다. 즉위한 이후에는 을사환국과 무신란, 을해옥사에 이르기까지 逆獄과 관련된 이들의 削奪官爵과 복직이 번복되었다. 이에 따라 영조 연간에 간행된 『선원보략』은 역옥과 관련된 자손록 중에서 관작 수정이 매번 제기되었다. 1734년 7월 11일에 종부시제조 宋寅明은 『선원보략』에 추기해야 할 사항과 1728년 戊申年 역옥에 연루된 이들의 관작 등을 釐正해야 함을 아뢰어 윤허하였다. 9월 17일에 교정청이 설치되었고 1719년(숙종 45) 전례에 따라 관원을 임명하였다. 9월 24일에는 교정청절목이 마련되었고 수정 작업은 三房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즉 一房에서는 御牒 수정, 元宗朝 大君派를 맡았고, 二房에서는 宣廟朝 王子君派와 仁祖朝 大君·王子君派, 孝宗朝 公主·翁主派를 맡았으며, 三房에서는 宣廟朝 公主·翁主派와 顯宗朝 公主·翁主派, 肅宗朝 王子君派를 맡았다. 각 방마다 전담할 낭청과 교정관, 서리가 배속되었고, 이 외에도 紙色書吏와 工房書吏, 匠人色書吏, 料祿色書吏를 두어 업무를 진행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列聖八高祖圖』가 별도로 작성되었으며, 이것이 정조 연간에 『선원보략』 내에 「열성팔고조도」가 수록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선원보략』에 추기하는 사항은 『국조어첩』에도 반영하게 되는데, 이후에는 『열성팔고조도』도 함께 수정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혈통의 유래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팔고조도』는 왕위를 계승한 嗣王에게는 필수적인 보첩이다. 1683년(숙종 9)雲興君 이영숙종에게 『열성팔고조도』를 올렸으나 간행되지는 못하였다. 1734년 운흥군의 아들 이엽영조에게 자신의 집에 소장하고 있는 팔고조도를 『선원보략』에 수록하기를 청하였다. 10월 3일에 종부시제조 송인명영조의 명을 받아 선원보각에 봉안한 『열성팔고조도』와 운흥군가의 것을 검토하여 보고하였다. 이를 계기로 영조는 『팔고조도』의 체계를 정비하였고, 私親 숙빈 최씨를 수록한 『팔고조도』도 작성하였다.
1735년(영조 11) 11월 26일 구관당상 密陽君 李梡은 자신들의 족보를 간행할 때는 최선을 다하면서, 『선원보략』을 수정할 때에 민첩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 관서의 태도에 대해 영조에게 아뢰었다. 이는 17세기를 전후하여 사가의 족보 간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사실과 『선원보략』의 수정에 대한 관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특성 및 가치
 본 의궤는 『선원보략』의 수정 외에 처음으로 『열성팔고조도』를 작성하게 되는 과정을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의궤에는 『선원보략』과 『국조어첩』, 『열성팔고조도』를 간행하고 正書하는 데 들어간 재료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다. 또한 물품을 제작할 장인을 동원하기 위해 관련 관서와 왕래한 문서에서 당시의 인력 수급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창애, 「조선 후기 선원보첩류의 편찬체제와 그 성격」, 『藏書閣』 17, 2007.
조계영, 「영조대 『선원계보기략』의 수정과 목판 간인」, 『한국문화』 50, 2010.

집필자

조계영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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