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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각봉심형지안(璿源閣奉審形止案)

자료명 선원각봉심형지안(璿源閣奉審形止案) 저자 종부시(宗簿寺) 편(編)
자료명(이칭) 璿源閣奉審形止案 저자(이칭) 宗簿寺(朝鮮) 編
청구기호 K2-3806 MF번호 MF35-621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其他/璿源存案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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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716(숙종 42년)
· 청구기호 K2-3806
· 마이크로필름 MF35-621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가치정보 귀중본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종부시(宗簿寺)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46.5 X 29.7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36.7×24.8㎝
· 인장 奉使之印,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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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16년(숙종 42) 7월 1일에 종부시직장 姜碩泰적상산성 선원각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보수한 후에 원래대로 어첩과 선원록을 봉안한 사안에 대한 형지안이다.
서지사항
표제는 ‘璿源閣奉審形止案’이다. 표지 장황은 빛바랜 황색 종이에 5침안으로 線裝해놓았다. 표지의 우측 상단에 ‘丙申七月日 赤裳山’이라는 기록이 있다. 종이는 楮紙를 사용하였으며 본문은 烏絲欄에 12行으로 墨書하였다. 제1면에 ‘李王家圖書之章’과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이 날인되어 있으며, 표지와 본문에 ‘奉使之印’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1716년 적상산성의 사고를 지키는 僧將 雪梅무주부사에게 文狀을 올려 선원각 후면 箭窓이 바람으로 저절로 열렸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번을 섰던 義僧 太仁에게 물으니 지난해 5월 僧將 義明이 재임할 때 이미 이와 같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관가에 보고하지 못한 것은 관직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무주부사가 직접 현장으로 가서 살펴보니 걸쇠는 그대로 탈이 없고 謹封紙의 가운데가 끊어졌지만 아직도 걸쇠에 매달려 있었다. 箭窓 내의 北邊의 藏子와 分閤도 반쯤 열려 있었다. 이에 무주부사전라감사에게 첩정을 올려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전라감사는 장계를 올려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장계는 종부시에 계하되어 종부시는 이에 대한 계목을 올리게 되었다. 종부시는 이 사실을 처음 발견하고도 그대로 둔 의명태인을 ‘不告之罪’로 엄히 다스리고, 낭청을 내려보내 실상을 정확하게 조사하겠다고 아뢰어 윤허하였다.
6월 22일에 종부시직장 강석태가 辭朝하고 출발하여 29일에 무주부에 도착하였다. 7월 1일에 무주부사 이덕영과 함께 적상산성에 올라가 선원각에 숙배하였다. 먼저 箭窓이 열린 곳을 살펴보니 무주부에서 살창 밖에 가로로 두 개의 판을 대놓았다. 다음으로 마루와 梯門을 보니 1712년 6월 17일에 봉안할 때에 종부시직장 임수경이 着署한 封標가 완전하게 있었다.
자물쇠를 열고 선원각 안을 살펴보니 전면의 複壁과 分閤·살창, 후면의 제1칸과 제2칸도 이상이 없었다. 후면의 살창은 장계에서 보고한 바와 같아 서가 위에 놓은 봉안 궤를 살펴보았다. 봉표지도 완전하고 덮어놓은 油芚도 동요한 흔적이 없었다. 天字궤에서 列字櫃와 의궤 궤, 형지안 궤 모두 17궤를 열고 확인하였다. 천자櫃 안에는 두 개의 소궤가 있는데 어첩과 어보가 있었다. 다른 궤에 있는 책의 권수를 차례로 1712년 형지안과 대조해보니 한 권도 착오가 없었다. 내외의 보자기와 주머니, 유둔 12건도 모두 무사했기 때문에 포쇄하고 이날이 환안 吉日이었기 때문에 봉안하였다. 선원각 전면의 분합 내에 있는 서까래에 비가 샌 흔적이 있어 改蓋하였다. 어첩을 봉안한 소궤에 궁포말을 넣은 주머니가 궤 아래만 있고 위쪽에는 없어 무주부에서 새로 만들어 넣었다. 살창에 꽂아둔 木釘이 없어 鐵釘을 만들어 꽂았고 分閤에 없던 위 걸쇠 8개를 설치하였다. 내외의 문에 封標하고 着名한 후에 낭청과 지방관이 四拜하고 물러나왔다. 선원각에 봉안한 17궤의 상세 내역은 1712년(숙종 38) 6월 17일에 작성한 형지안과 동일하다. 즉 1714년(숙종 40)에 수정한 선원록이 1716년(숙종 42) 7월까지 봉안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형지안 궤에는 이번 1716년 『선원각봉심형지안』을 포함하여 32권의 형지안이 보관되었다. 본 형지안의 좌목에는 奉審後還安郎廳 종부시직장 강석태와 지방관 무주부사 李德英, 사고참봉 朴昌來·李震爀이 수록되었다. 좌목 다음 장에는 예조에서 내려보낸 서리 徐挺翼池達河가 기재되었다.
특성 및 가치
 본 형지안은 선원각 내부에 이상이 발생할 경우 담당 승장이 무주부에 보고하고, 무주부에서는 전라감영에 보고하고, 전라감영은 국왕에게 장계를 올려 사안을 알리는 사례이다. 이를 통해 선원각을 관리하는 지방과 중앙의 행정 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

집필자

조계영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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