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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각개구형지안(璿源閣改構形止案)

자료명 선원각개구형지안(璿源閣改構形止案) 저자 종부시(宗簿寺) 편(編)
자료명(이칭) 璿源閣改構形止案 저자(이칭) 宗簿寺(朝鮮) 編
청구기호 K2-3803 MF번호 MF35-615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其他/璿源存案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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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681(숙종 7년)
· 청구기호 K2-3803
· 마이크로필름 MF35-615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가치정보 귀중본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종부시(宗簿寺)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9.7 X 29.4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31.4×23.0㎝
· 인장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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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681년(숙종 7) 8월 종부시직장적상산 선원각을 다시 짓기 위해 선원록을 대별관에 이안하고 선원각을 건립한 후 본래대로 봉안한 사안에 대한 형지안이다.
서지사항
표제는 ‘璿源閣改構形止案’이다. 표지 장황은 빛바랜 황색 종이에 매화와 연꽃이 들어간 회자문양이 있는 것이고, 홍색 실로 선장해놓았다. 표지 우측에 ‘康熙二十年(1681)辛酉’라고 적혀 있다. 표지는 공문서로 추정되는 고문서를 재활용하였다. 본문은 11행에 맞추어 烏絲欄을 직접 그은 것이며 어미는 없다. 본문 첫 면 우측 상단에 첨지를 붙여 표식을 하였으나 종이 대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현재 ‘考’자만 남아 있다. 본문의 글씨는 해서로 적어놓았다. 지질은 두꺼운 壯紙이며 책 수는 14장 1책이다. 인장은 본문 첫 면에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 ‘李王家圖書之章’을 날인하였다.
체제 및 내용
전라도에서 적상산성의 사각과 선원각에 비 새는 곳이 많이 있고 건물이 기울어졌다는 狀啓를 올렸다. 국왕이 장계를 예조에 내렸고 예조에서는 史閣은 史官을 내려보내어 포쇄와 수리를 하며, 선원각은 종부시 관원이 내려가 처리하도록 啓目을 올렸다.
선원록청전라도에 관문을 보내어 선원각을 다시 짓기 위해 담당자가 내려간다는 것과, 공사에 필요한 재목과 기와 등을 미리 조치하여 지체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알렸다. 7월 24일 종부시직장 최○는 사조후에 출발하여 8월 1일에 무주부에 도착하였다. 2일에 무주부사 강석구와 함께 선원각에 숙배하고 봉한 자물쇠를 살펴보니 모두 착오가 없었다. 선원각을 열고 이전에 봉안하였던 궤 여섯 상자를 대별관으로 옮겼다. 선원각은 즉시 공사를 시작하였고 사안을 맡은 낭청은 적상산성에 머물렀다. 8월 8일에 낭청은 선원록청으로 첩정을 올려 진행 상황을 보고하였다. 선원각은 많이 기울어져 있고 비가 새는 곳도 많아서 수리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기존의 건물을 무너뜨리고 새로 짓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공사의 형세와 속도를 예상해보니 10여 일 정도로 예상되는데 낭청이 무주에 머물러 있다가 공사가 완료되면 선원록을 본래대로 봉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첩정에서는 대략 8월 20일에 還安할 길일을 결정하되 그 전에 27일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할 것 같으면 다시 길일을 결정하여 내려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해 선원록청은 낭청이 오래 머물면 폐가 되니 반드시 8월 20일까지 공사를 마치도록 하고, 적상산성에 머물면서 선원각을 다시 짓는 곳을 살펴보고 8월 27일에 포쇄한 뒤에 본래대로 봉안하라고 회답하였다.
지방의 선원각에 선원록을 봉안하러 행차할 때에 봉안 길일을 택일하여 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번 사례에서와 같이 현장에 도착하여 선원각을 다시 짓는 공사일 경우에는 일의 진행 상황에 따라 봉안일이 변동되었다. 이때에는 본청에 보고하여 다시 길일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선원각 내의 바닥에 까는 地衣는 오래되어 훼손되었기 때문에 개비하고 이전 것은 불태웠다. 공사를 마치고 8월 27일에 선원각에 선원록을 봉안하였다. 어첩은 먼저 大緞 보자기로 싸서 黑漆한 소궤에 넣고 두석으로 장식한 열쇠를 謹封紙로 두르고 着署하였다. 이 소궤를 紅紬 보자기로 싸서 天字의 궤에 봉안하였다.
선원록은 전례대로 각 궤에 나누어 담고 근봉지에 착서하였다. 태조의 『종친록』과 『유부록』부터 14권은 地字궤에 넣고, 태종의 『종친록』과 『유부록』부터 인종의 선원록까지 12권은 玄字궤에 넣었다. 세종의 『종친록』과 『유부록』부터 『당대선원록』까지 18권은 黃字궤에 넣었다. 宇字궤에는 각 식년 『종친록』과 『유부록』 35권을 넣었다. 이 선원록은 모두 홍주 보자기로 싸서 궤에 넣었다. 이번 형지안을 포함하여 형지안 궤에는 모두 17권의 형지안을 보관하였다. 형지안은 2건을 작성하여 1건은 선원각 형지안 궤에 넣어 보관하고, 나머지 한 건은 선원록청으로 가지고 갔다. 좌목에는 모두 3인이 있는데 사고 참봉과 이안과 환안을 담당했던 낭청, 그리고 한 사람은 성씨 ‘趙’만을 기록하여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형지안의 본문에도 이 3인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특성 및 가치
 1662년(현종 3)적상산 선원각을 개조한 이후 20년 만인 1681년(숙종 7)에 헐고 다시 지은 사안에 대한 형지안이다.

집필자

조계영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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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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