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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각개건후환봉안형지안(璿源閣改建後還奉安形止案)

자료명 선원각개건후환봉안형지안(璿源閣改建後還奉安形止案) 저자 종정원(宗正院) 편(編)
자료명(이칭) 璿源閣改建後還奉安形止案 저자(이칭) 宗正院 編
청구기호 K2-3802 MF번호 MF35-615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其他/璿源存案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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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02(광무 6년)
· 청구기호 K2-3802
· 마이크로필름 MF35-615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가치정보 귀중본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종정원(宗正院)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48.5 X 31.0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38.2×26.0㎝
· 인장 茂朱郡印,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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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902년(광무 6) 10월 11일에 秘書院郞兼任宗正院主事 柳寅哲이 선원각을 다시 건립한 후에 서책을 봉안한 형지안이다.
서지사항
표제는 ‘列聖朝實錄還奉安形止案’이고, 내제는 ‘璿源閣改建後還奉安形止案’이다. 표지 장황은 빛바랜 황색 종이에 斜格卍字 문양이 있는 것이고, 홍색 실로 선장해놓았다. 표지 우측에 ‘光武六年(1902)壬寅十月十日日’, ‘赤裳山城史庫修理後藏’이 적혀 있다. 본문은 12행에 맞추어 烏絲欄을 직접 그은 것이며 어미는 없다. 본문의 글씨는 해서로 적어놓았다. 본문 마지막에 ‘秘書院郞兼任宗正院主事 臣柳寅哲’과 무주군수 李翼鎬의 좌목이 있다. 지질은 저지이며 책 수는 14장에 1책이다. 인장은 본문 첫 면에 ‘茂朱赤裳山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 ‘李王家圖書之章’을 날인하였다.
체제 및 내용
적상산 선원각은 여름철 습기와 겨울철 비바람에 견뎌내야 하는 여건이었다. 1901년(광무 5) 10월 24일에 議政府議政 尹容善은 선원각이 100여 년이 넘은 노후 건물이어서 봄에 땅이 녹으면 붕괴될 염려가 있음을 아뢰었다. 그러나 선원각을 새로 건립하는 데에 들어갈 예산은 6만 兩 정도로 추산되어 갑자기 경비를 마련하는 것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에 議政府參書官적상산으로 파견하여 형편을 상세히 조사하여 경비를 산정하기로 하였다. 또한 소요되는 경비는 우선 무주군의 公錢에서 사용한 후에 度支部에서 計勘하는 것으로 논의하였다. 이듬해인 1902년 3월 7일에 담당 관원으로 秘書院郞兼任宗正院主事 柳寅哲은 辭朝하고 출발하여 15일에 적상산에 도착하였다. 류인철은 16일에 무주군수 閔泳復과 선원각에 肅拜한 후에 봉안 궤를 安國寺 東法堂에 옮겨 봉안하였다. 3월 19일에 선원각 공사를 시작하여 기초를 다지고 27일에 주춧돌을 놓았다. 4월 1일에 기둥을 세우고 10일에 들보를 올렸다. 5월 7일에 校正郎廳이 서울에서 선원보략 등을 가져왔으며 모든 서책을 포쇄하고 다음 날 돌아갔다. 이에 대한 형지안이 1902년 5월의 『璿源閣曝曬形止案』(K2-3816)이다. 선원각 공사는 9월 20일에 모두 마쳤으며, 10월 11일에 본래대로 봉안하였다. 종정원주사무주군수가 선원각에 四拜하고 물러나왔다. 교정낭청이 가져와 이번에 새로 봉안한 선원보략은 모두 16건 128책이었다. 그 내역은 1844년(갑진)·1846년(병오)·1848년(무신)·1850년(경술)·1851년(신해)·1852년(임자)·1853년(계축)·1853년(계축)·1856년(병진)·1858년(무오)·1859년(기미)·1861년(신유)·1863년(계해)·1865년(을축)·1883년(계미) 각기 8책씩이었다. 여기에 1900년에 간인한 선원보략을 補刊한 8책과 『列聖皇后王妃世譜』 5책을 보략 궤에 봉안하였다. 황후라고 호칭한 것은 1897년(광무 1)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고 ‘대한’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天字궤에는 『列聖誌狀』 14책을 봉안하였다. 이 형지안에서는 1844년(헌종 10)에 『종반행적』 궤에 봉안했던 식년 선원록을 冬字궤에 옮기고, 목록도 천자문의 순차에 맞추어 收字궤 다음에 수록하였다. 동자궤에는 『璿源續譜』를 담은 다섯 개의 函도 봉안하였다. 『선원속보』는 각 국왕의 왕자를 派祖로 삼은 파보를 모은 大同譜의 성격을 지닌다. 고종이 즉위한 후 1867년에 『선원속보』가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1900년(광무 4)에 덕흥대원군파 이하 20파를 수정하여 『선원속보』를 補刊하였다. 『선원속보』의 목록책은 형지안 궤에 보관하였다.
특성 및 가치
 이 형지안은 담당 관원을 파견하여 3월 19일에 시작한 선원각 건립이 9월 20일까지 계속되자, 그 사이 5월 7일에 서울에서 다른 관원이 추가로 봉안할 서책을 가지고 내려오는 사례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원창애, 「조선 후기 선원보첩류의 편찬체제와 그 성격」, 『藏書閣』 17, 2007.

집필자

조계영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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