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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

자료명 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 저자 진전중건도감(조선)(眞殿重建都監(朝鮮)) 편(編)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3594 MF번호 MF35-759~760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工營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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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01(광무 5년)
· 청구기호 K2-3594
· 마이크로필름 MF35-759~760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45.6 X 32.0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철장(鐵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31.3×25.6㎝
· 인장 一品奉使之印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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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901년(광무 5) 6월에 진전인 璿源殿을 중건하고 7개 실의 어진을 移摹한 전말을 기록한 의궤이다.
서지사항
표제와 권수제, 서근제는 ‘眞殿重建都監儀軌’이다. 표지 장황은 민무늬의 짙은 朱色 면직물을 사용하였다. 서명은 표지에 직접 墨書하여 鐵裝하였다. 鐵釘을 박은 三針眼으로 중간에 銅環을 달아놓았다. 표지 우측에 ‘道光五年辛丑(1901)六月 日’, 하단 중앙에 ‘璿源殿上’이 기록되어 있다. 본문의 판식은 四周單邊에 上內向二葉花紋魚尾인 인찰공책지에 필사하였다. 字數는 12行字數不定이다. 책 수는 1冊 125張이고, 본문의 종이는 壯紙를 사용하였다. 본문에 〈璿源殿圖〉가 있다. 본문 마지막에 ‘都提調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議政臣尹[수결]’을 적어놓았다. 인장은 매 면마다 ‘一品奉使之印’을 날인하였다.
체제 및 내용
1900년(광무 4) 윤8월 21일 慶運宮璿源殿 정전에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7개 실의 어진을 奉出하지 못하여 이로 인해 선원전을 중건하고 7개 실의 어진을 다시 제작해야만 했다. 본서는 당시 꾸려진 진전중건도감 일의 진행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본문은 〈璿源殿圖〉, 시일, 좌목, 조칙(附 奏本別單), 상량문, 의주, 재용(附 月銀匠料), 감결, 照會, 通牒(附 來牒), 훈령, 보고, 稟目, 賞典, 의궤사목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선원전도〉에 대한 도설에 의하면 정전 36간, 이안청 12.5간(2간 신건, 10간 移建), 肅敬齋 10.5간, 內齋室 4.5간, 複道閣 1.5간은 모두 새로 지었다. 어재실 12간은 이건하였고, 좌우 중간에 排設廳 10.5간, 복도각 2간, 제기고 12간은 신건하였다. 정전 행각 28.5간(24간 이건, 4.5간 신건), 내외 廚房 46간, 生物房 31간은 신건하였다. 숙경문 1.5간, 紹休門 1.5간, 敷德門 1간, 穆淸門 2간, 於紹門 1간, 協嘉門 1간은 신건하였다. 別軍官 처소 12간(4간 신조, 8간 이건), 兵丁 처소 9간은 신건하였다.
「시일」은 1900년 윤8월 24일 궁내부에서 도감 당상과 낭청을 차출하였고, 9월 2일 永成門 내 前摹寫都監에서 會同하였다. 9월 8일 營繕司에 도감을 설치하고, 治木의 일을 시작하였다. 9월 16일 터를 다지는 일을 시작하고, 10월 2일 일을 정지하고 이듬해 봄에 재기하기로 하였다. 1901년 1월 22일 터를 닦고, 2월 3일 정초하였다. 2월 5일 前 眞殿 移安廳을 撤毁하고, 3월 15일 전 진전 御齋室을 철회하였으며, 3월 23일 기둥을 세웠다. 4월 6일 상량하였고, 4월 7일 전 진전 행각을 철회하였으며, 4월 15일 이안청, 어재실의 기둥을 세웠다. 4월 27일 각실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4월 28일 이안청, 어재실의 상량을 하였다. 5월 11일 각실 영정을 肅敬齋로 이안하였고, 改甎하여 廳의 始役을 하였다. 5월 19일 廳의 일을 모두 마치고, 5월 23일 각실 영정을 환안하였다. 6월 26일 모든 役을 마쳤다.
「좌목」은 도제조沈舜澤에서 그의 병으로 인해 尹容善으로 체임되었고, 제조민영환, 신기선, 김석진, 조희일이었다. 도청은 심계택, 서만순, 낭청은 이원규, 신성수, 윤태길, 감조관은 윤언구, 오원영 등 22명, 掌務員 정희윤, 雇員 최태현 등 8명, 私庫直 2명, 사령 9명, 사환 8명으로 구성되었다.
1900년(광무 4) 윤8월 22일 조칙에 의하면, 고종은 영정의 이모도감과 선원전의 중건도감을 合設하여 거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진전 영정을 移摹할 때, 제1실은 1898년(광무 2) 이모한 濬源殿태조대왕 翼善冠本으로, 제2실은 1868년(고종 5) 이모한 영희전숙종대왕 익선관본으로, 제3실은 1864년(고종 1) 도사한 冷泉亭영조대왕 익선관본으로, 제4실은 1851년(철종 2) 도사한 平樂亭정조대왕 遠遊冠本으로, 제5실은 1890년(고종 27) 도사한 영희전순조대왕 원유관본으로, 제6실은 1886년(고종 23) 도사한 평락정문조대왕 冕服本으로, 제7실은 1846년(헌종 12) 도사한 평락정헌종대왕 익선관본을 臺本으로 이모하도록 하였다.
「의주」는 眞殿重建上樑儀를, 「재용」에는 탁지부에서 가져온 110만 1,960兩 4錢에서 22만 1,835兩 1錢 3分을 모사도감에 移送하고, 9,115兩 4分을 영희전 내 閭闔의 개수비로 이송한 내용을 적었다. 또한 도감의 도청, 낭청, 제조관, 별간역과, 고원, 사령, 사고직, 사환 등의 月銀式과 제색 工匠과 擔軍, 支架軍, 募軍의 匠料式을 상술하였다. 「照會」에는 탁지부, 산릉도감, 法部 등에서 요청한 조회 문서를, 「照覆」에는 그에 대한 답신을 보낸 문서를 기술하였다. 「통첩」은 警部, 산릉도감, 장례원, 장생전, 營繕司 등에서 보낸 통지문과 「來牒」은 그에 대해 왕래한 문서를 보낸 것이다. 「보고」는 강화부윤, 개성부윤, 함경남도 관찰사 등이 보고한 문서를 정리한 것이다. 「실입」은 선원전의 중수와 어진 이모에 소용된 물품을 정리하였고, 「상전」은 도감에 참여한 都提調 이하 工匠에 이르기까지 賞賜한 내역을 기록하였다. 그중 어진 이모와 관련하여 화원 吳寅善, 金普賢, 李宗錫, 화사 朴致淳, 柳春英, 崔宜煥 등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궤사목」에 의하면, 의궤는 7건이 제작되어 규장각, 시강원, 선원전, 의정부, 비서원, 장례원, 강화사고 등에 분상되었다. 권미에 도제조, 제조, 도청, 낭청의 수결이 차례로 있다.
특성 및 가치
 〈선원전도〉와 그 도설을 통해 1901년(광무 5) 선원전을 중건 규모는 물론, 선원전 제1실부터 제7실까지 어진을 이모한 대본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진행 과정에서 왕래한 각종 문서와 인력과 물력의 비용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이다. 당시 1901년 7개 실 어진 모사에 대한 세부 사항은 7개 실 영정 舊本을 移摹하여 선원전에 봉안하기까지 주요 일정과 관련 도설을 함께 엮은 장서각 소장 『영정모사도감의궤』(K2-2768)를 참조할 수 있다.

집필자

정은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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