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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전영건도감의궤(永禧殿營建都監儀軌)

자료명 영희전영건도감의궤(永禧殿營建都監儀軌) 저자 영건도감(營建都監) 편(編)
자료명(이칭) 永禧殿營建都監儀軌 저자(이칭) 營建都監(朝鮮) 編
청구기호 K2-3575 MF번호 MF35-552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工營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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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00(광무 4년)
· 청구기호 K2-3575
· 마이크로필름 MF35-552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영건도감(營建都監)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44.6 X 32.2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31.1×25.5㎝
· 인장 一品奉使之印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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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900년(광무 4) 6월 永禧殿을 옛 경모궁 터에 營建한 사실을 기록한 儀軌이다.
서지사항
표제와 권수제는 ‘永禧殿營建都監儀軌’이다. 서근제는 ‘永禧殿營建都監儀軌’이고, 서근제 양쪽 옆으로 干支 ‘庚子’와 冊次 ‘全’이 표기되어 있다. 표지 장황은 민무늬의 옅은 綠色 표지를 사용하였다. 서명은 표지에 직접 墨書하여 線裝하였다. 본문의 판식은 四周單邊에 上內向二葉花紋魚尾인 인찰공책지에 필사하였다. 字數는 12行 24字이다. 책 수는 1冊 175張이고, 본문의 종이는 楮紙를 사용하였다. 본문에 〈永禧殿圖〉와 彩色된 〈永禧殿各室 影幀移奉敎是時班次圖〉가 있다. 본문 마지막에 ‘提調從一品崇祿大夫 宮內府特進官 臣閔[수결]’이 있다. 충해가 심해 낱장별로 배접한 후 제책하였다. 인장은 각 면마다 ‘一品奉使之印’을 날인하였다.
체제 및 내용
영희전조선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의 御眞을 모셨던 전각이다. 원래는 세조의 장녀 의숙공주의 생가였으며 중종 원년에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거처였으나, 1619년(광해군 11) 이곳에 태조세조의 어진을 모시며 ‘南別殿’이라 불렀다가 1690년(숙종 16)에 ‘永禧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후 지속적으로 중건되었고, 1900년(광무 4)景慕宮 터에 營建하기에 이르렀다.
의궤의 체제는 먼저 〈永禧殿圖〉를 권수에 그리고, 時日, 도감의 좌목, 詔勅(附 奏本別單), 儀言, 상량문, 財用(祔 月銀匠料), 상전, 감결, 照會, 通牒(附 封牒), 稟目, 의궤사목의 순서로 기술되었다.
영희전도의 단면도를 그리고 그에 대한 도설에는 正殿 36間, 移安廳 10間, 御齋室 15間, 전사청 29間, 제기고 2間 등 각 건물별 규모를 間數로 상세하게 적었다.
영희전 영건과 관련한 전말을 적은 「시일」에는 1899년(광무 3) 11월 29일 궁내부에서 도감의 당상을 차출하여 12월 30일 宗正院에 도감을 설치하고 1900년 1월 23일 전 경모궁 터에 영건을 시작하였다. 4월 4일 어재실을 定礎하고, 4월 24일 이안청을 정초하고 이날 睿齋室, 香大廳 이하를 수리하고 전사청, 제기고, 수라간 이하의 新建을 시작하였다. 5월 1일 永禧殿班次圖 1건과 皇太子宮 1건을 內入하였다. 5월 2일 南殿 6실의 영정을 영희전에 移奉하고 6월 2일 영건을 마쳤다. 6월 8일 제1실, 제6실의 標題를 고종황제가 친서하고 작헌례를 행하였다.
「좌목」은 도제조 의정부 의정 윤용선, 제조궁내부 특진관 민영환, 장례원경 김석진 등 4명을 비롯하여 도청 2명, 낭청 2명, 監造官 4명, 掌務員 1명, 고용직 공무원인 雇員 6명, 使令 5명, 私庫直 2명, 使喚 4명이었다.
「조칙」은 1899년 10월 22일 장종대왕태묘에 부묘한 후 고종황제영희전 6실의 어진을 전 경모궁에 이봉할 것을 영건도감을 설치하여 길일을 택하여 시역할 것을 명한 것부터 1900년(광무 4) 6월 5일 영희전 이봉 후 고종황제가 6월 8일 친행하여 작헌례를 행하고 제문을 직접 찬할 것을 알린 것까지 영건과 관련된 조칙을 시간순으로 기술하였다.
「의주」에는 永禧殿各室影幀移奉儀, 永禧殿移建上樑儀, 永禧殿移建上樑文을 차례로 실었다.
「재용」에는 탁지부에서 가져온 72만 4,961兩 6錢 7分 내에서 사용한 내역을 적었다. 먼저 16만 787兩 7錢 9分을 摹寫都監에서 사용하고, 月銀式에는 도청, 낭청, 감조관별 간역비로 1인당 매월 50냥, 고원은 1인당 매월 40냥, 사령은 1인당 매월 20냥, 사환은 1인당 매월 15냥을 지급하였고, 匠料式에는 제색 공장 1인당 매월 2냥 4전, 모군은 1인당 매월 1냥 2전을 지급하였다.
이후에는 상전별단, 1899년(광무 3) 3월 15일부터 1900년 5월 2일까지 감결이 실렸다. 그리고 탁지부, 시종원, 장례원 등에서 왕래한 照會, 태의원, 내장원, 장생전, 영희전, 태복사, 상의사, 통신원 등의 通牒, 소용된 물품을 나열한 實入, 화원 金世榮, 사자관 鄭台永을 비롯한 각 工匠의 이름이 상세히 기술되었다.
영건도감의궤는 7건이 제작되어 규장각, 시강원, 영희전, 비서원, 장례원, 의정부, 강화사고 등처에 분상되었고, 그중 규장각시강원 건은 사자관 1명, 화원 1명, 雇員 3명, 書寫 1인, 사령 2명, 군사 2명을 使役하였다.
품목에는 의궤 7건을 제작할 때 초주지, 저주지, 홍황양지 등 종이와 각종 소용된 물품이 상세히 나열되어 주목할 만하다. 그 뒤로 영희전에 영정을 이봉하는 반차 행렬을 그린 〈永禧殿各室影幀移奉敎是時班次圖〉를 73면에 걸쳐 채색으로 필사하였다. 의궤의 권미에는 낭청, 도청, 제조, 도제조 등의 수결이 있다.
특성 및 가치
 1900년 대한제국기 고종황제에 의해 주도된 영희전 영건에 대한 전말을 확인할 수 있으며, 권두의 〈영희전도〉와 그에 대한 도설은 당시 영희전의 규모를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당시 어진을 이봉하는 반차 행렬을 채색으로 필사하여 행렬의 규모 및 의장과 구성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시각 자료로 의미가 있다.

집필자

정은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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