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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胎封)

자료명 태봉(胎封) 저자 이왕직(李王職) 편(編)
자료명(이칭) 胎封 저자(이칭) 李王職 編
청구기호 K2-2910 MF번호 MF35-4862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典禮/安胎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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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28]
· 청구기호 K2-2910
· 마이크로필름 MF35-4862
· 기록시기 [1928~1930年]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이왕직(李王職)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27.3 X 19.2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1.8×16.0㎝
· 인장 藏書閣印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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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일제강점기 각 지역에 분산된 胎室을 西三陵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관리들의 복명서 등을 모아 놓은 자료이다.
서지사항
표지 장황은 황갈색 종이로 하였는데, 1973년에 개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은 四周雙邊 上下向朱魚尾의 李王職 印札空冊紙에 13行 字數不定으로 기록하였다. 原稿本으로 보이는데 무엇의 원고인지는 알 수 없다. 卷末部에는 圖案이 그려진 작은 책이 함께 編綴되어 있다. 제1면에는 ‘藏書閣印’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나면 胎盤을 궁궐에 보관했다가 약 5개월 정도가 지난 뒤에 길지를 선정해 태실을 조성해서 안장하였다. 현재 전국 각지에 전하는 胎封이라는 지명의 대부분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일제는 전국 각지에 분산된 태실을 파괴하고 태실에 봉안된 태항아리를 꺼내 西三陵 한곳에 모았다. 이는 결국 조선왕조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서는 전국의 태실을 옮기는 과정에서 작성된 관원들의 복명서 등을 수록한 자료이다.
먼저 「胎封沿革」에서는 관련 의궤나 『護産廳日記』 및 『春官通考』 등을 바탕으로 태봉의 연혁을 정리하고, 이어 태실이 조성되는 과정을 洗胎吉時推擇, 세태, 안태, 胎封出及出發ノ儀, 安胎時行列人員比較表, 行祭儀, 安胎時祭物陳設圖 등의 순서로 수록하였고, 계속해서 『춘관통고』의 내용을 바탕으로 태봉 선정과 관련한 기록이나 告后土祭文 등을 수록하였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1928년 9월 예식과 전사보 鄭樂鵬 등이 이왕직장관韓昌洙에게 보내는 복명서가 수록되었다. 정낙붕 등은 경상북도 김천군 지례면 관덕리숙명공주숙경공주의 태실, 성주군 성암면 대봉동태종 태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동세조 태실, 永川郡 청통면 치일리인종 태실, 경상남도 사천군 곤명면 은사리단종세종의 태실 등을 이봉하기 위해 출장을 갔던 것이다. 문서는 복명서와 함께 각 지역에 있던 태실의 현황과 이봉 순서 등을 기록하였다.
이어 1930년 4월 태실을 서삼릉에 매안할 때 배진 순서와 매안 순서를 기록한 뒤에 帝王胎室表石書寫式, 世子以下胎室表石書寫式이라 하여 각 태실 표석의 전면과 후면의 刻字를 위한 서식을 수록하였다. 또한 태실의 신설지와 각각의 태실 표석에 실례를 들어 기록하였다. 계속해서 서삼릉에 조성된 태실도와 표석, 그리고 태실의 구조를 도면으로 제시하였다. 英親王의 장남인 李晉의 태실을 이봉하는 순서와 필요한 준비 물품과 지석 등을 수록하였고, 胎封地圖面과 謝后土祭ノ儀와 진설도, 胎室移葬地略圖를 비롯해 원래의 태실에 있던 표석과 태항아리, 지석, 표석, 石柱干欄의 도면을 수록하였다.
특성 및 가치
일제강점기 조선왕조 말살 정책의 한 단면을 밝히는 데 참고가 된다. 나아가 현재 서삼릉에 위치한 조선왕조 태실의 조성 과정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집필자

이근호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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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