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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묘의궤(私廟儀軌)

자료명 사묘의궤(私廟儀軌) 저자 장례원(掌禮院) 편(編)
자료명(이칭) 私廟儀軌 저자(이칭) 장례원 , 掌禮院(朝鮮)編 , 장예원(조선) 편(掌禮院(朝鮮)編)
청구기호 K2-2453 MF번호 MF35-559
유형분류 고서/의궤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典禮/殿·宮·廟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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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897
· 청구기호 K2-2453
· 마이크로필름 MF35-559
· 기록시기 1897~1907年(光武年間)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가치정보 귀중본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장례원(掌禮院)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41.7 X 32.2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31.7×25.6㎝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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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德興大院君宮, 全溪大院君宮, 宣禧宮에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는 祝式을 모은 儀軌이다.
서지사항
표지 서명은 ‘私廟儀軌’이다. 제첨 위에 기재되어 있으며, 제목 하단에는 ‘宣禧宮儀軌附’라고 적혀 있다. 서근제는 없으며, 표지는 비단 장정에 紅絲로 된 5침안의 장정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9행으로 제작된 오사란 종이에 필사되어 있으며, 총 12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면 1행에는 ‘德興大院君宮祝式’이라 기재되어 있다. 국왕의 이름이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諱’라는 글자를 써 놓았고, 별도의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제11면 부분은 ‘宣禧宮祝式’ 부분으로 일부 항목은 종이를 덧대어 이전의 글자를 수정한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서문이나 목차 없이 그대로 축식을 열거하고 있어 제작 동기를 알 수 없다. 대두법과 격자법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체제 및 내용
본서는 「德興大院君宮祝式」, 「全溪大院君宮祝式」, 「宣禧宮祝式」을 싣고 있으며, 그중 「선희궁축식」은 正朝, 寒食, 端午, 秋夕에 사용한다고 표기하고 있다. 「덕흥부원군궁축식」에 사용된 연호는 光緖(1875~1908)이고 「전계대원군궁축식」에서는 광서道光(1824~1850), 선희궁축식에서는 도광을 사용하였다.
私廟는 국가의 공적인 묘가 아닌 개인의 묘를 가리킨다. 당시 국가 전례에서 자주 논의되는 사묘는 왕과 정비 사이에서 태어난 후계자가 아니라 방계에서 왕통을 이은 왕의 私親을 모신 사당을 일컫는다. 덕흥대원군궁宣祖의 생친인 덕흥부원군河東府大夫人 鄭氏를 모신 宮이다. 明宗이 후사 없이 죽자 中宗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아들 河城君 李鈞(宣祖)이 입후되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1569년(선조 2) 덕흥군을 존숭하여 대원군으로 삼고, 그 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으로 삼았다. 전계부원군궁에는 哲宗의 생부인 전계대원군과 그의 부인 完陽府大夫人 崔氏龍城府大夫人 廉氏를 모셨다. 철종전계대원군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희궁에는 思悼世子의 생모 暎嬪 李氏를 모셨다. 이곳은 1761년(영조 38)에 ‘義烈’로서 묘호를 삼아 세워졌으나, 1788년(정조 12)에 ‘선희’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축식에는 ‘의열’로 사용하고 있다. 이 축식에서는 앞의 두 축식이 ‘國王’이라고 자칭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皇帝’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 있다. 이를 통해 이 의궤의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특성 및 가치
왕과 정비 사이에서 태어난 후계자가 아니라 방계에서 왕통을 이은 왕의 私親을 모신 사묘에 대한 의례를 따로 정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며, 이것은 왕실 문화 연구에 참조점이 된다.

집필자

김혁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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