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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홍릉천봉산릉주감의궤([明成皇后]洪陵遷奉山陵主監儀軌)

자료명 [명성황후]홍릉천봉산릉주감의궤([明成皇后]洪陵遷奉山陵主監儀軌) 저자 홍릉천봉산릉주감(洪陵遷奉山陵主監) 편(編)
자료명(이칭) 洪陵遷奉山陵主監儀軌 저자(이칭) 遷陵主監(朝鮮) 編
청구기호 K2-2387 MF번호 MF35-406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典禮/陵·園·墓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원문텍스트 이미지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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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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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919
· 청구기호 K2-2387
· 마이크로필름 MF35-406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홍릉천봉산릉주감(洪陵遷奉山陵主監)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28.0 X 20.3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1.1×15.4㎝
· 인장 藏書閣印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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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高宗明成皇后 閔妃의 능인 洪陵의 遷奉과 山陵의 시말을 기록한 의궤이다.
서지사항
표지 서명은 ‘洪陵遷奉山陵儀軌’이고, 내제는 ‘洪陵遷奉山陵主監儀軌’이다. 표지를 개장한 것으로 보이나 개장 기록은 없다. 본문은 10행 20자로 상하향흑어미의 李王職 인찰 공책지에 필사되어 있다. 제2~4장은 주색 이왕직 인찰 공책지를 사용하였는데, 후에 다시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서미에 張次를 朱書하였는데, ‘遷山幾’로 표기하였다.
체제 및 내용
본 의궤는 1919년 고종의 승하로 이루어진 홍릉의 산릉 조성과 명성황후 민씨의 천봉을 기록한 것이다. 의궤의 목록은 時日, 座目, 下敎及上啓, 寢殿上樑文, 陵上閣, 隧道閣, 鉤捧機, 別轆轤, 天中鐵, 輪轝平牀, 貼木, 槊木, 寢殿內排設, 欑宮, 回南首平牀 등 15개 항목이다.
「시일」은 1919년 1월 26일부터 3월 20일까지 천릉과 산릉의 과정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1919년 1월 26일에 홍릉 천봉 일자를 택일할 것을 하교하여 27일 金谷에 封標하였다. 그 후 3월 20일 천봉을 마치고 安陵奠을 설행함으로써 모든 일정을 마쳤는데, 50여 일이 소요되었다. 이 의궤의 날짜 기록에는 양력이 사용되었다. 「좌목」은 홍릉의 천릉을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이다. 總護使의정부 의정 尹容善(1829~1904)과 궁내부 특진관 沈舜澤(1824~?)이 번갈아 제수되었다. 總護員 子爵 閔永奎, 提調궁내부 특진관 李根命 외 11인, 都廳 4인, 郎廳 22인, 監造官 74인, 監造員 6인, 別監董 8인, 別看役 9인, 相地員 4인, 擇日員 1인 등의 명단이 실려 있다. 그런데 좌목을 보면 홍릉 천봉의 시일과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총호사 윤용선심순택1919년 홍릉 천봉 당시에는 이미 사망하였고, 이들이 총호사로 활동한 시기도 1900년(광무 4)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다른 인물들의 재임 시기도 광무 4~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1900년 홍릉의 묏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홍릉천봉도감을 설치하여 妙積山 금곡으로 천봉할 때 참여하였던 천봉도감의 관리들인 경우 그때의 임명 기록부터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교급상계」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1900년 6월 21일부터 1904년 11월 13일까지 실시된 명성황후 능의 천봉에 관한 것이고, 뒷부분은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에 따라 1919년 1월 26일부터 3월 20까지 이루어진 산릉에 관한 내용이다. 앞부분에 나오는 1900년 6월 21일 궁내부 특진관 李載純(1851~1904)의 상소에, 명성황후의 능 조성이 풍수상 갑론을박이 있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6월 24일에 천봉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尹德榮(1873~1940?)과 閔丙星 등이 참여하여 천봉을 결정하였다. 6월 26일 총호사 윤용선이 11조의 사목을 마련하여 산릉 役事를 시작하였다. 7월 11일에 東南西道를 간산한 뒤에 山論別單을 들였는데, 이때 천봉 지역으로 거론된 곳은 君莊里·金谷·車踰峴·花蝶洞 등 27곳이나 되었다. 이를 3차례의 간심 끝에 8월 24일 양주 묘적산 금곡으로 결정하였다. 이같이 결정된 금곡도 10월 15일 윤용선 등이 천봉지를 옮길 것을 건의하여 10월 18일에 천봉 장소를 군장리로 바꾸었다. 그런데 천봉지로 결정된 군장리1901년 4월 19일에 심순택이 다시 천봉 지역을 양주 금곡으로 바꿀 것을 청하여, 4월 21일에 금곡리가 최종 천봉지로 정해졌다. 그러나 실제로 홍릉의 천봉은 고종이 승하한 1919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뒷부분은 고종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여 3월 20일까지 홍릉을 조성하는 동시에 그동안 미루어 왔던 명성황후 능의 천봉이 진행되어 고종의 능에 합장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고종 승하 이후 홍릉의 조성과 직접 관계된 내용은 여덟 장의 짧은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데, 「시일」의 내용과 일치한다.
침전상량문, 능상각, 수도각, 구봉기, 별녹로, 천중철, 윤여평상, 첩목, 삭목, 침전내배설, 찬궁, 회남수평상 등 12개의 항목은 제작 방법, 형태와 규격, 소요 재료 등을 기록한 것으로 前代의 의궤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丁字閣은 침전으로 바뀌었고, 전대의 의궤에는 각 기구들의 그림이 있었으나 본 의궤에는 생략되었다.
「침전상량문」은 1900년 홍릉 천봉 논의 당시에 마련한 것이다. 상량문은 의정부 의정 윤용선이 짓고, 홍문관 학사 金永穆(1835~1910)이 썼다. 천릉과 산릉에 필요한 기물들의 용도는 다음과 같다. 능상각은 흔히 甕家라고 한다. 啓陵을 위해 봉분 위에 설치한 구조물이다. 수도각은 능상각 남쪽 앞으로 바로 잇대어 세워지는 구조물이다. 구봉기는 轆轤 기둥 위에 설치하는 네모난 틀을 말한다. 별녹로는 內梓宮을 외재궁에 진입시키는 기구로 일종의 도르래이다. 천중철은 능상각의 중앙 꼭대기에 매달아 놓아 광의 중심을 바로잡았다. 윤여평상은 재궁을 실어 줄을 이용해 밀어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된 평상이다. 첩목은 輪轉할 때에 재궁이 가로 넘어질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외재궁 안 좌우에 설치하는 것이다. 삭목은 외재궁 안의 좌우 첩목 안에 설치하는 것이다. 「침전내배설」에는 침전 안에 배설할 물건의 종류와 수량 등을 기록하였다. 더불어 재궁을 산릉으로 올린 후에 앞서 배설한 것들을 철거하고 새로 배설할 물건들을 정리해 놓았다. 찬궁은 재궁을 모시기기 위해 빈전 안에 설치한 작은 집 모양의 구조물이다. 회남수평상은 재궁의 앞을 남쪽으로 돌릴 수 있도록 하는 기구이다.
특성 및 가치
본 의궤는 『洪陵遷奉山陵主監儀軌』(K2-2388)의 정본을 완성하기 전에 만들어진 편집본으로 판심에 ‘李王職’이라 찍혀 있는 인쇄지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정본에는 능상각, 수도각, 구봉기, 별녹로, 천중철, 윤여평상, 첩목, 삭목, 침전내배설, 찬궁, 회남수평상 등의 그림이 있으나, 본 의궤에는 상단의 여백에 ‘有圖’라고 표시된 후 생략되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모든 체제와 내용이 정본과 똑같다.

집필자

성봉현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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