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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문초(下敎文草)

자료명 하교문초(下敎文草) 저자 승정원(承政院) 편(編)
자료명(이칭) 下敎文草 저자(이칭) 承政院(朝鮮) 編 , 승정원(조선) 편(承政院(朝鮮)編)
청구기호 K2-2380 MF번호 MF35-388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典禮/陵·園·墓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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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800(정조 24년)
· 청구기호 K2-2380
· 마이크로필름 MF35-388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가치정보 귀중본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승정원(承政院)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2.8 X 22.7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4.4×17.1㎝
· 인장 藏書閣印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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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正祖1799년1800년에 부친 思悼世子의 능인 顯陵園에 行幸할 때에 輦路 백성들의 조세나 부역을 감해 주라는 3건의 下敎 초고이다.
서지사항
표지 서명 하단에 ‘全’으로 표기되어 있다. 표지를 개장한 것으로 보이나 개장 기록은 없다. 앞표지와 본문 사이의 隔紙에도 서명이 墨書되어 있다. 본문은 총 여섯 장으로 사주단변 상하향2엽화문어미의 인찰 공책지에 10행 20자로 필사되어 있다. 본문을 묵서로 교정한 흔적이 남아 있다. 본문 제1장에 ‘藏書閣印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본 『하교문초』는 1799년(정조 23) 2월 17일과 1800년 3월과 4월에 정조현륭원에 행행할 때 輦路 주변 백성들이 연로를 닦는 일이나 화성 부근에 나무를 심는 일, 다리를 보수하는 일이 힘든 것을 감안하여 조세나 부역을 감하여 주라는 하교 초본 3건이다.
본서의 구성은 첫째 1799년 2월 17일에 내린 ‘園幸輦路掃雪軍給復敎’이다. 금년 초 한겨울에 현륭원으로 행행할 때 輦路의 백성들이 연로의 눈을 쓰는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연로 田夫들이 예컨대 1結을 역에 응하였으면 그중 몇 負를 給復으로 감해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朝家의 은혜를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둘째 1800년 3월 17일에 내려졌던 ‘華城種樹敎’이다. 당시 화성八達門 밖에서 柳川泥浦 사이는 땅이 넒은데도 경작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두 가지 계책을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營屯田의 경작자를 모집하되 간척 비용은 本府가 부담하고 대신 일정한 면적의 소출만 관용으로 하며 나머지는 백성이 갖게 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곡물을 바치면 벼슬을 주는 방법 즉 토지 몇 日耕을 개간한 사람에게는 空名告身을 주어 일정한 관직 이하에 임명하자는 것이다.
셋째로 1800년 4월 23일에 내린 ‘安寧里橋路補築待秧役後爲之敎’이다. 내용은 다리와 도로의 補築은 농한기에 할 것이고, 보축할 곳은 大皇橋 위에서부터 逌瞻峴 아래로 安寧里 앞까지라고 한 것 등이다.
특성 및 가치
정조가 매년 현륭원을 성묘할 때 서울의 各營과 各司는 물론 지방 민읍과 輦路 주변 백성들의 피해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에 정조가 몇 차례 연로 주변의 백성들에게 면세해 준 사실이 『正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下敎文草』에 수록된 면세 기사를 실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 기사는 『정조실록』의 기사를 보충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집필자

성봉현
범례
  •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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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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