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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보역절목(明陵補役節目)

자료명 명릉보역절목(明陵補役節目) 저자 예조(禮曹) 편(編)
자료명(이칭) 明陵補役節目 저자(이칭) 禮曹(朝鮮) 編
청구기호 K2-2304 MF번호 MF16-292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政書類/典禮/陵·園·墓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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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769(영조 45년)
· 청구기호 K2-2304
· 마이크로필름 MF16-292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예조(禮曹)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6.5 X 24.9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5.8×20.8㎝
· 인장 禮曹之印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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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明陵을 補役 하기 위해 내린 傳敎 및 節目 등이 정리되어 있다.
서지사항
表紙書名은 ‘明陵補役節目’이다. 표지 서명 하단에 ‘全’으로 표기되어 있다. 어미가 없는 朱絲欄에 半葉 8行 17字로 筆寫되어 있다. 마지막 장에 ‘禮曹之印’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1769년(영조 45)명릉을 補土하기 위해 내린 전교, 예조의 보고 및 10개 항목의 「명릉보역절목」이 정리되어 있다. 명릉1701년(숙종 27) 숙종(1661~1720)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1667~1701)가 승하하자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안에 조성한 왕릉이다. 1720년(숙종 46)숙종이 승하하자 쌍릉을 조성하였고, 1757년(영조 33) 그 오른쪽 언덕에 인원왕후 김씨(1687~1757, 숙종의 계비)를 묻었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명릉보역절목』(K2-2305)과 내용이 동일하다.
영조는 생부인 숙종의 능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는데, 1769년(영조 45) 무렵 명릉과 주변 산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런 연유로 그해 봄에 米 5백 석과 布 20동 등을 내려 대대적인 補土 공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영조는 왕세손(후에 정조)을 거느리고 명릉에 행차하여 친히 展拜하고 象設 왼쪽에 나아가 부복을 하고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명릉보역절목」은 영조명릉 행차 직후에 작성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1769년 9월에 陵官을 임명하고, 매년 명릉을 補役하기 위하여 香炭稅錢 가운데 1백 50냥을 마련하여 ‘補役錢’이라고 하였으며, 10개 항의 절목 1건을 마련하였다. 절목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입직 관원이 왕릉이 조성된 산을 돌아볼 때에 조금이라도 무너진 곳이 있으면 3일 안에 보토 작업을 하고, 얼음이 풀릴 때와 큰비가 내린 후에는 특히 세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였다. 100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하는 공사에는 예조에 보고하고, 공사에 필요한 흙은 경계 밖에서 구하고, 도끼와 삽 등을 구비하도록 하였다. 役丁은 육군 80명으로 하고, 매일 아침과 저녁 및 점심에 각각 料米 1승과 7합씩을 내렸다. 또한, 다른 인원을 고용할 경우에 高價는 2전을 넘지 않도록 하였다.
특성 및 가치
영조 대 왕릉의 관리와 보역 공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이며, 왕릉 공사에 참여하는 인원의 규모와 임금 지급 상황을 알 수 있다.

집필자

김세은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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