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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4(詩文類4)

자료명 시문류4(詩文類4) 저자 미상(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유형분류 고문서/기타 주제분류 기타
수집분류 민간/기증·기탁·조사/고문서 자료제공처 디지털아카이브(SJ_ARC_BB)
서지 디지털아카이브 해제 디지털아카이브
원문텍스트 디지털아카이브 이미지 디지털아카이브

· 서지정보 서지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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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문서명시문류4
한자문서명詩文類4
이명(한글)
이명(한자)
수취(한글)미상
수취(한자)미상
발급(한글)미상
발급(한자)미상
찬자(한글)미상
찬자(한자)未詳
발급목적大學補遺 관련 李浚 문자를 辨破하는 글
간행년(서기력)미상   미상 -
유형고문서
크기270x23cm
관인수
청구기호
소장처원소장처와 동일
소장처1경상북도
소장처2경주시
소장처3安康邑 玉山1里 1600番地 李海轍
MF
자료유형전통명가소장고문서자료(전통시대지방사회경제사자료)

해제정보

해제작성자김채식
해제작성일2002-07-10
간행처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해제작성언어국한문 혼용
해제내용
詩文類4
김채식
【정의】
辨破錄. 퇴계의 문하에서 晦齋의 손자 李浚 등이 퇴계가 李湛에게 보낸 편지를 왜곡하여 퇴계를 욕보였다고 성토하며 이를 조목별로 반박하는 문서.
【내용】
[주제]
이 문서는 퇴계의 문하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발단은 퇴계가 靜存 李湛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롯되었다. 퇴계는 이 편지에 ꡔ大學ꡕ의 次序에 관한 자신의 세 가지의 입장을 밝혀 놓았다. 즉 첫째, 三綱領이 工夫의 功效가 있으니, ‘古之欲明明德…’에 붙여 읽어서는 말이 급박하고 뜻이 소략하다. 둘째, 대학의 여러 곳에서 工夫를 말하여 功效에까지 이르거나, 병통을 이야기하여 힘써야 할 곳을 보여주는데, 지금 知止章에서는 그 효과만 말하였고, 物有本末章은 윗 문장을 결론지으면서 정작 그 뜻은 설명하지 않은 것, 그리고 聽訟章이 格致에는 관련이 없는데 格致의 傳으로 연결시킨 것은 잘못이다. 셋째, 綱領과 條目 가운데에 비록 ‘本末’ 두 글자가 없을지라도 두 글자를 염두에 두고 해석하여야 선유의 뜻을 옳게 이해하는 것이다.위의 문제들의 발단은 ꡔ대학ꡕ에 있어서 회재가 程子의 학설을 따랐다면, 퇴계는 朱子의 학설을 따랐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세 가지 언급 중에 충돌이 크게 일어난 것은 聽訟章에 대해서이다. 이준은 蘇齋 盧守愼(1515~1590)에게 올린 편지에서 이를 문제삼았다. 즉, 회재의 ꡔ大學章句補遺ꡕ에 聽訟章은 경문의 結語로 되어 있는데, 퇴계는 회재가 청송장을 格致의 傳으로 보았다고 이해하였으니, 이는 퇴계가 초년기에 회재의 글을 보고 이후 다시 정정한 책을 보지 못하여 다만 잘못 전해진 것을 들었기 때문이며, 퇴계는 만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발명하는 글을 지으려 하였으나, 갑자기 죽는 바람에 하지 못하였다는 등의 말로 퇴계의 편지를 해석하였다.이에 퇴계의 문하에서는 퇴계를 욕보인 일이라고 분격하여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그 요지는 퇴계가 회재의 글을 초년에만 본 것이 아니고, 죽기 직전까지 보았다는 것을 퇴계의 글을 통해 알 수 있고, 또 이준의 부친인 李全仁이 회재가 지은 책을 陶山의 퇴계에게 壬戌년에 가져다 주었는데, 퇴계가 정존 이담에게 편지한 것이 甲子년이므로 그 책을 3년 동안 보아온 것이 되므로 잘못 전해진 것을 들은 것이 아니다. 또 퇴계가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발명하려 하였다는 말은, 퇴계가 만년까지 이전인이나 荷谷 許篈 등에게 준 편지에 보면 퇴계는 늘 주자의 설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뉘우쳤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으며, 퇴계는 평소 잘못이 있으면 늘 고쳤는데 高峯 奇大升과 왕복한 편지가 그 증거이다. 만약 발명하려는 의지가 있었으면, 이전인에게 한마디의 말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이 그 반박의 대체적인 요지이다.아울러 총론에서는, ꡔ대학ꡕ의 次序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논의는 그 유래가 오래되어 程子와 朱子의 序次도 이미 각각 다르니, 이는 선유들의 깊은 뜻인데 이준 등이 감히 얕은 지식으로 마음대로 거리낌없이 왜곡하였고, 게다가 그 자손들이 이 책을 회재와 이전인의 문답 기록인 ꡔ關西問答ꡕ의 아래에 붙여 방자하게 세상에 전하려 하였다. 이는 이준 등이 방자하게 저지른 일이므로 일월성신과 같은 퇴계에 흠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옛날 선현들은 선생에 대해 틀리게 기록한 곳이 발견되면 털끝만큼도 용서하지 않았던 예가 있고, 게다가 이준 등은 잘못 기록한 정도가 아니라, 퇴계의 편지를 왜곡시키기까지 하였으니, 더욱 용납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글을 붙여 놓았다.
[용어]
[인물]
李浚(1540~1623): 자는 淸源, 호는 求菴. 晦齋 李彦迪의 손자.
李全仁(1516~1568): 자는 敬夫, 호는 潛溪. 회재 이언적의 아들로 회재를 강계의 유배지에서 모시며 학문적인 가르침을 받아 이를 ꡔ關西問答ꡕ으로 정리하였다. 회재의 사후에 회재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李湛(1510~1557): 자는 仲久, 호는 靜存齋, 본관은 龍仁. 퇴계와 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성리학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지명]
【특징】
【비고】
[작성정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08.16
해제작성,입력,교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작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