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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171(簡札171)

자료명 간찰171(簡札171) 저자 독락당(獨樂堂)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유형분류 고문서/기타 주제분류 기타
수집분류 민간/기증·기탁·조사/고문서 자료제공처 디지털아카이브(SJ_ARC_BB)
서지 디지털아카이브 해제 디지털아카이브
원문텍스트 디지털아카이브 이미지 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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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문서명간찰171
한자문서명簡札171
이명(한글)
이명(한자)
수취(한글)박광보
수취(한자)朴光輔
발급(한글)독락당
발급(한자)獨樂堂
찬자(한글)미상
찬자(한자)미상
발급목적章山書院의 奉安文과 春秋祝을 지어 보내면서 봉안문을 60구로 지은 것에 대한 배경을 설명
간행년(서기력)正祖4   1780 -
유형고문서
크기78.3x33.6cm
관인수
청구기호
소장처원소장처와 동일
소장처1경상북도
소장처2경주시
소장처3安康邑 玉山1里 1600番地 李海轍
MF
자료유형전통명가소장고문서자료(전통시대지방사회경제사자료)

해제정보

해제작성자이성주
해제작성일2002-07-10
간행처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해제작성언어국한문 혼용
해제내용
簡札171
이성주
【정의】
경자년(1780, 正祖 4) 10월 1일에 박광보(朴光輔)가 독락당(獨樂堂)으로 장묘(章廟)의 봉안문(奉安文)과 춘추축(春秋祝)을 지어 보내면서 봉안문의 구수(奉安文句數)가 60구로 지은 것에 대하여 그 철학적 이유를 밝히는 내용의 편지.
【내용】
[주제]
지시하신 대로 장묘(章廟)의 봉안문(奉安文)과 춘추축문(春秋祝文)을 지어 올리는데, 봉안문을 60구절로 지은 것은 고인이 ꡔ주역(周易)ꡕ의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등에 근거하여, 60이란 수는 천지의 음양이 변역(變易)하여 유행(流行)하는 상수(常數)라는 사실에 근거하였다 설명했다. 이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을 길게 열거하면서, 보름쯤에 그곳에 가서 서로 약속하고 부중(府中)으로 들어갈 계획이니 그때에 여러분과 만나도록 주선해 주시면 고맙겠다는 사연이다.
[용어]
신후(愼候)는 질병을 뜻한다. 척말(戚末)은 친적 가운데 나이든 사람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장묘(章廟)는 장산서원 묘우(章山書院廟宇)를 뜻한다. 뇌정(牢定)은 굳게 결정했다는 뜻이다. ꡔ태현경(太玄經)ꡕ과 ꡔ잠허서(潛虛書)ꡕ, 「팔진도(八陣圖)」․「육화진(六花陣)」․ꡔ참동계(參同契)ꡕ는 모두 책이름이다.
[인물]
잠계(潛溪:1516, 중종11~1568, 선조 1)는 회재선생의 서자로 이름은 전인(全仁), 자는 경부(敬夫), 잠계는 호이다. 어려서부터 기질이 온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잠시도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받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몸가짐이 삼가고 걸음이 법도에 맞았으며 문예가 일찍 성취하였으나 과거(科擧)에 뜻을 둔 바가 있어서 약관(弱冠)에 「서천잠(誓天箴)」을 지어 뜻을 세우고 한 평생을 은거하여 자적(自適)하였다. 1547년 문원공(文元公:晦齋)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안치되었는데 이 때 잠계가 모시고 가서 효성을 다하여 모셨으며, 학문에 관하여 문답한 ꡔ관서문답(關西問答)ꡕ을 엮었다. 1553년(明宗 8) 문원공이 강계에서 돌아가시자,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영구를 고향으로 옮겼다. 그 뒤에도 회재의 못 이룬 뜻 을 이어 임금께 애군우국(愛君憂國)하는 뜻의 상소를 1566년(明宗 21)에게 올려 감오(感悟)한 명종(明宗)은 문원공의 관작(官爵)을 복위시켜 주었다. 그후 문원공의 가장(家狀)을 기초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가 행장(行狀)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 퇴계선생의 권유로 호를 「잠계」라 지었는데, 그 뜻은 면천(眠川)이 란 시냇물에서 따온 것이다. 세간에 “잠계가 없으면 회재가 없었다〔無潛溪 無晦齋〕”는 말이 있듯이 그의 일생은 부친의 현양(顯揚)에 바쳤다고 할 수 있다. 양자운(楊子雲)과 사마공(司馬公:司馬光)․제갈선생(諸葛先生:諸葛孔明)․이정(李靖)은 중국의 인물이다.
[지명]
아촌(阿村) 명동(明洞)
【특징】
박광보가 「장산서원 봉안문(章山書院奉安文)」을 지을 때 문장 구성에 관하여 고심했던 것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글을 지을 무렵 한 손으로 부친을 부축하여 천리 빙판길을 갔다.”는 구절에 이르러 당시 상황을 상상하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잠계공이 돌아가신 뒤 2백년 뒤인 1768년 무렵에 포양(褒揚)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고, 그후 13년 지난 이즈음에 장산서원이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고】
이 간찰에 언급된 박광보의 「장산서원 봉안문(奉安文)」은 회재선생의 후손인 이질(李耋) 등에 의하여 1847년(憲宗 13)에 간행된 ꡔ잠계유고(潛溪遺稿)ꡕ 부록에 실려 있다. 앞의 간찰 167-1(B20000872-01E), 즉 명동(明洞)에서 국동(菊洞)에 태극(太極)의 시비(是非)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을 해명한 답장도 박광보의 글씨로 추정된다. 발신자가 살던 마을도 모두 명동이다.
[작성정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08.16
해제작성,입력,교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작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