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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167(簡札167)

자료명 간찰167(簡札167) 저자 명동(明洞)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유형분류 고문서/기타 주제분류 기타
수집분류 민간/기증·기탁·조사/고문서 자료제공처 디지털아카이브(SJ_ARC_BB)
서지 디지털아카이브 해제 디지털아카이브
원문텍스트 디지털아카이브 이미지 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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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문서명간찰167
한자문서명簡札167
이명(한글)
이명(한자)
수취(한글)국동
수취(한자)菊洞
발급(한글)명동
발급(한자)明洞
찬자(한글)미상
찬자(한자)미상
발급목적太極是非에 관하여 상대의 분명한 論辨을 요구함
간행년(서기력)미상   미상 -
유형고문서
크기58x24.3cm
관인수
청구기호
소장처원소장처와 동일
소장처1경상북도
소장처2경주시
소장처3安康邑 玉山1里 1600番地 李海轍
MF
자료유형전통명가소장고문서자료(전통시대지방사회경제사자료)

해제정보

해제작성자이성주
해제작성일2002-07-10
간행처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해제작성언어국한문 혼용
해제내용
簡札167
이성주
【정의】
6월 24일에 국동(菊洞)과 명동(明洞) 사이에 태극시비(太極是非)에 관한 발언으로 인하여 논란이 일어난 사태에 대하여 피차간의 입장을 해명하는 편지.
【내용】
[주제]
첫째로 국동에서 명동으로 보낸 편지에서는, 형이 양동(良洞)에 보낸 힐문(詰問)하는 편지의 사설(辭說)이 모호(糢糊)하여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사정을 말하였다. 이어 지난 1월 국휼(國恤)을 당했을 때 성복(成服)한 뒤 곡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형이 저의 집을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와 양동 진사 이정엄(進士 李鼎儼)과 옥산(玉山) 주인집에서 토론할 때, 이야기가 태극시비(太極是非)의 일에 이르러 이진사께서 변무(辨誣)한 세 선비의 형벌(刑罰)을 반드시 격파하여야 치욕을 씻을 수 있노라고 말하기에, 제가 놀랍고 분개하여 노당(魯堂)의 여러 친구에게 이 말을 전하고, 말이 흉측하고 험악하여 인산(因山)이 끝난 뒤에 처리하려고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양동에서 해명을 하고자 하건만 형은 들고 금방 잊었노라고 하시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면서 해명을 요구하는 사연이다.
[용어]
경염(庚炎)은 삼복(三伏) 더위를 말하는데, 경(庚)이라 한 것은 하지(夏至)가 지난 셋째 경일(庚日)이 초복(初伏)이 되기 때문이다. 태극시비(太極是非)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 성종 22~1553, 명종 8))이 27세에 시골에 묻혀 있을 즈음에 유학자이면서 선학(禪學)에 치우친 노학자인 망기당(忘機堂) 조한보(趙漢輔)와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학설에 젖어든 망재(忘齋) 손숙돈(孫叔暾)에게 태극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일이 있었다. 그의 손자 준(浚)이 이를 정리하여 퇴계(退溪)에게 질정(質正)을 구하니 매우 찬탄하였다. 뒤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주자(朱子)와 회재(晦齋)의 편지 가운데 태극에 대하여 논변한 것을 모아 ꡔ태극문변(太極問辨)ꡕ이란 책으로 간행하였다. 절간(折柬)은 편지를 쓴다는 뜻이다. ‘장군을 죽이고 병부(兵符)를 빼앗았다〔斬將竊符〕’는 말은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침입하자 위(魏)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릉군은 그의 책사(策士) 후영(侯嬴)의 모략으로 여희(如姬)의 도움을 받아 위나라 장수 진비(晉鄙)의 병부(兵符)를 훔쳐 위나라 군사를 끌고 나가 조나라를 구원했다. 이런 과정에서 의심하고 따르지 않던 진비를 역사(力士) 주해(朱亥)가 철퇴로 내리쳐 죽인 일을 가리킨다. 노당(魯堂)은 충남 논산에 있는 노강서원(魯岡書院)으로 이해된다.
[인물]
신릉군(信陵君)은 전국시대 위(魏)나라 소왕(昭王)의 아들로 자는 무기(無忌), 신릉(信陵)은 그의 봉호(封號)이다. 사람됨이 인자하고 자신을 낮추니 사방에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몰려들어 식객(食客) 3천인을 거느렸다고 전한다.
[지명]
국동(菊洞) 명동(明洞) 양동(良洞) 옥산(玉山)
【특징】
당대 유림(儒林)의 대명제(大命題)였던 태극(太極)과 이기(理氣)에 대한 논변이 후대의 학자와 자손에까지 연계되어 진행되었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아울러 전국시대 위나라 신릉군의 고사를 들어 자신의 입장을 비유하는 것도 재미있다.
【비고】
첫째 줄의 오(唔)자는 오(晤)의 오자(誤字)이다. 다른 간찰과는 달리 해서(楷書)로 썼다.
【정의】
앞의 편지를 받은 그 날 6월 24일에 명동(明洞)에서 국동(菊洞)에 자신의 입장을 해명한 답장.
【내용】
[주제]
먼저 안부를 전한 뒤에, 그 말의 뿌리가 분명히 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는데, 어찌 감히 형을 맹랑(孟浪)한 처지에 빠지게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어 자신은 전날의 말을 상세히 기억하니 이처럼 좋지 않은 일을 당하여 예전의 좋은 안면을 배척하는 것은 충후(忠厚)한 도가 아니고, 게다가 오래 전에 다 잊은 일이라 하며 이미 양동에 이 뜻을 설명하였으므로 더 이상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으니 조만간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끝을 맺었다.
[용어]
조안(早晏)은 조만간(早晩間)이란 뜻이고, 면서(面叙)는 서로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함을 말한다.
[인물]
[지명]
【특징】
【비고】
앞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첨부한 것으로 보인다.
[작성정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08.16
해제작성,입력,교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작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