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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총명록(勝聰明錄)

자료명 승총명록(勝聰明錄) 저자 구상덕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MF 35-006334
유형분류 고서/일기 주제분류 개인/생활/일기
수집분류 민간/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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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일기
· 내용분류 개인-생활-일기
· 작성지역 경상도 고성현 (현재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 작성시기 1725 (乙巳)
· 비고 『승총명록』,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MF 35-006334
·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상도 고성현 광일면(光一面) 도산리(道山里)
현소장처: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저자 具尙德 구상덕 1706 - 1761 양반

형태사항

· 크기(cm) 29.4 X 22.5
· 판본 필사본(筆寫本), 영인본(影印本)(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재질 종이
· 표기문자 한자

· 안내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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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승총명록(勝聰明錄)
월봉(月峯) 구상덕(具尙德, 1706~1761)1725년 7월 29일부터 1761년 8월 25일까지 37년간 고성지역을 배경으로 쓴 농촌생활일기이다. 이 일기의 표제인 총명보다 낫다(勝)라는 ‘승총명록(勝聰明錄)’은 ‘사람의 총명함이 서투른 솜씨나마 기록하는 것만 못하다(聰明不如鈍筆)’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기록의 중요성과 그것이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본 일기자료는 고성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의 농사와 관련된 기후변화와 물가변동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기록하여 당시대의 문화와 경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하다. 이외에도 자녀교육, 관혼상제, 기근, 지방여론 등 일상생활의 온갖 일들을 기술하고 있어 기존 사료에서 볼 수 없는 지방사와 생활문화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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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건우
허옥(許玉)
허옥은 향교의 장의(掌議)를 역임하였으며, 거주지는 용동(龍洞)이다. 1727년 윤3월 27일 산사(山寺)에서 구상덕과 함께 공부하던 중 먼저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으로 시를 지어 주었고 구상덕은 이에 차운하여 절구시(絶句詩)를 써서 주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남국승(南國升)
남국승(南國升)의 본관은 의령(宜寧), 자(字)는 사진(士晉), 호(號)는 내와(耐窩)이다. 이안재(易安齋)정임기(鄭林起)에게 학문을 익혔고, 제산(霽山)김성탁(金聖鐸)구와(懼窩)이광점(李光漸)과 함께 교우가 있었다. 필법이 중국 왕희지(王羲之)에 가까웠다고 한다.
남국승구상덕 등과 함께 옥천사(玉泉寺)관음전(觀音殿)에서 과거시험 공부를 위해 자주 거접(居接)하였다. 1726년 2월 11일에 구상덕은 함께 거접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남국승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진양속지(晋陽續誌)』

집필자

김건우
김동준(金東俊)
1736년 3월 19일 고성 사또 김동준이시항(李時沆)죽도(竹島)에서 배를 띄워 놓고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는데 구상덕에게 화운시(和韻詩)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1736년 3월 28일 객사(客舍)를 중수(重修)하고 낙성(落成)을 축하하는 연회석상에서 구상덕은 시를 지어 김동준에게 바쳤다. 1736년 9월 4일 구상덕김동준의 임기가 끝날 무렵 유임을 바라는 청원서를 작성하였다.
『승총명록』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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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건우
이광점(李光漸)
이광점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字)는 진여(進汝), 호(號)는 구와(懼窩)이며,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의 후손이다. 다. 문집으로 『남해공유집(南海公遺集)』이 남아 있다. 남국승구상덕 등과 함께 옥천사(玉泉寺)관음전(觀音殿)에서 과거시험 공부를 위해 자주 거접(居接)하였다. 이안재(易安齋)정임기(鄭林起)에게 학문을 익혔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이수석(李綏錫)
향교의 장의(掌議)를 역임하였으며, 거주지는 두포(頭浦)이다. 1727년 10월 5일 이수석구상덕의 집을 방문하자 닭을 잡고 술을 마련하며 한바탕 즐겁게 놀고 7언 절구시를 지어 기쁨을 표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최선여(崔善餘)
최선여구상덕의 벗으로, 갈산(葛山)에 거주하였으며 수시로 서로 방문하며 유숙하였다. 1726년 5월 28일 구상덕은 자신의 여종인 옥비(玉婢)를 보내 최선여 집안의 이앙(移秧)을 돕게 하였으며, 그 후 최선여가 곤궁한 지경에 처하자 보리 3두(斗)를 주어 급한 상황을 구제하였다. 그리고 최선여가 종자벼[種租]5두(斗)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정임기(鄭林起)
정임기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字)는 여신(汝新), 호(號)는 이안재(易安齋)이다. 부는 정혜(鄭潓), 조부는 진사(進士) 정홍석(鄭弘錫), 증조부 장사랑(將仕郞) 정지(鄭墀), 고조부는 원종공신인 정언충(鄭彦忠)이다. 외조는 순흥안씨 안수호(安受瑚)이다. 구와(懼窩)이광점(李光漸)내와(耐窩)남국승(南國升)이 그의 문하생이다.
1727년 1월 16일 생원 정임기가 딸자식 혼례를 치르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혼수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구상덕에게 자신의 노비를 사 줄 것을 직접 만나서 청하고, 또 두세 차례 편지를 통해 간곡히 요청하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심도행(沈道行)
구상덕과 함께 종종 의상암(義湘庵)에 가서 독서를 하였는데, 심도행이 전(錢) 9푼(分)으로 남초(南草) 1파(把)를 사서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1728년 3월 11일 독서하려고 구상덕을 방문하였다가 자신의 이름을 개명(改名)해주기를 요청하였으므로 구상덕이 ‘심(沈)’ 자(字)는 물 ‘수(水)’를 부수로 따르고 있고, 물에는 응당 용(龍)이 있어야 하니 ‘익용(翼龍)’이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함에 따라 심익용(沈翼龍)으로 개명하였다.
그 후 구상덕에게 언해(諺解)가 있는 『맹자』전질을 빌려가기도 하였다. 유람이나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길에서 구상덕과 서로 수창한 한시가 『승총명록』에 많이 남아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우홍주(禹洪疇)
1725년 12월 24일 생원 우홍주가 환자(還上)를 미납하여 통영 감옥에 갇히게 되자 구상덕이 약간의 조(租)로 급한 상황을 구제하였다. 그리고 우홍주의 모친상 초기(初朞)에 구상덕이 가서 만나보기도 하였고, 우홍주의 부탁으로 그의 매부(妹夫) 당장(堂長) 이석겸(李錫謙)의 제문(祭文)을 짓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김유징(金有徵)
1729년 12월 5일 정수사(淨水寺)관음전(觀音殿)에서 거접할 적에 김유징이 뒤늦게 참여하였다. 그런데 1730년 1월 8일 김유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다음날 구상덕은 만사를 지어 애도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김대흥(金大興)
거주지는 통영으로, 원래 산사(山寺)의 승려에게 공부를 배우다가 구상덕에게 배운 생도이다. 1728년 11월 18일 정창세(丁昌世)김대흥 등에게 학문에 매진할 것을 권면하는 글을 써서 준 적이 있으며, 1728년 12월 1일 파접(罷接)할 때 김대흥에게 시를 써서 이별의 아쉬운 정리(情理)를 토로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정창래(丁昌來)
본관이 창원(昌原)으로, 어버이가 위독하자 단지(斷指)하여 한나절 간 목숨을 연장시켰다. 구상덕과는 6촌이며, 동시에 함께 공부하고 유람하였던 절친한 벗이었다. 고성 향교의 중수(重修) 및 액외교생(額外校生)의 일로 통영관아를 수시로 출입하였다. 특히 구상덕정창래가 죽은 후 그의 효행을 포양하기 위해 1750년 11월 13일 문장(文狀)을 작성해서 관아에 올렸다. 이후 그의 효행사실이 기묘년(1759, 영조 35)에 입계(入啓)되었고, 1762년에 복호(復戶)를 받았다.
『승총명록』
『철성지』

집필자

김건우
박명재(朴明梓)
1734년 9월 27일 사망하였는데 구상덕의 부친 구후청구상덕이 그를 위해 애도하는 만사를 지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최한전(崔翰全)
최한전은 첨사(僉使)를 지냈다. 1735년 9월 5일 구상덕이 만사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손시완(孫是梡)
1736년 2월 7일 영천(永川) 향교 원장인 손시완고성 교당(校堂)에 와서 바다를 구경하고 시를 지었는데, 이 시에 구상덕이 차운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최경회(崔慶會)
최경회의 호는 송와(松窩)이고,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강직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1726년 8월 8일 구상덕이 사직제(社稷祭) 대축(大祝)으로 참여했을 때 최경회는 초헌(初獻)으로 사직제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최경회가 화답시를 요청하자 구상덕이 응하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채이휴(蔡以休)
채이휴의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거주지는 청주(淸州)이며, 자(字)는 여구(汝久)이다. 1736년 12월 28일 고성구상덕을 방문하였고, 이별할 적에 구상덕이 한시를 써서 주었다. 당시 채이휴는 여러 고을의 지방관들과 통영 등지를 나그네 유람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마방목』에 의하면, 1726년(영조 2)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 2등(二等) 17위로 입격하였는데, 구상덕채이휴를 진사(進士)로 부르고 있었다.
『승총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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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건우
이석림(李錫臨)
거주지는 음법(陰法)으로, 향교 장의(掌議)를 역임하였다. 구상덕이석림은 자주 서로 방문하는 사이였다. 1729년 10월 21일 구상덕이석림의 집을 방문하여 『서전(書傳)』 몇 권을 빌려오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최수회(崔壽會)
최수회고성 향교 도유사(都有司)를 지냈으며, 1743년 3월 28일 구상덕최수회의 만사(輓辭)를 지었다. 최수회의 묘소는 가동면(可洞面)신화동(新化洞) 간좌(艮坐)에 위치한다.
『승총명록』
『철성지』

집필자

김건우
이재첨(李再瞻)
거주지는 송정(松亭)이며 고성 향교의 유사를 맡았다. 구상덕이재첨이 사위를 맞이할 때 예식을 가서 보고, 액외교생(額外校生)의 일로 구상덕과 함께 경상도 관찰사에게 청원활동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김창록(金昌祿)
고성 성문 남쪽에 거주하였던 구상덕의 벗인 김태욱(金兌郁)의 아들이다. 구상덕은 13세 김창록의 뛰어난 문재(文才)를 보고 놀라는 한편 시를 지어 그의 자만심을 경계하였다. 김태욱은 죽으면서 구상덕에게 아들 김창록을 부탁하였는데, 당시 사방에 전염병이 발생하자 안정사(安靜寺)소월암(笑月庵)김창록을 피접시키고, 양식을 마련하고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 때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하기를 권면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그 후 다시 가섭암(迦葉庵)에 옮겨 피접시켰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이호(李灏)
생원 이호의 자는 사순(士淳)이며, 거주지는 진주이다. 구상덕의 서당에 얼마간 머물며 시를 주고 받으며 교유를 맺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이덕배(李德培)
1755년 9월 22일 구상덕이덕배(李德培)의 만시(輓詩)를 지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백봉익(白鳳翼)
1755년 10월 6일 구상덕백봉익(白鳳翼)의 만시(輓詩)를 지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변홍점(邊鴻漸)
변홍점의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1755년 10월 26일 구상덕을 방문하여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이학응(李學膺)
이학응구상덕의 서당에 와서 공부한 생도이다. 1759년 9월 26일 이학응『통감(通鑑)』 6권을 끝내고 양식을 계속 댈 수가 없어 서당을 떠나게 되자 구상덕은 글을 지어 그의 재능을 칭찬하고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이윤성(李允成)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1759년 12월 22일 통제사로 임명되어 부임지 통영으로 내려왔다. 이에 대해 구상덕은 예전에 통제사를 지낸 이창조(李昌肇)의 증손(曾孫)임을 언급하고, 7언 절구시를 지어 경축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황민중(黃敏中)
황민중구상덕을 종종 문후하였으며 이에 대해 1760년 10월 20일 구상덕은 5언 율시를 지어 주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김광복(金光復)
1761년 1월 7일 김광복김시혁(金時赫) 형제와 함께 구상덕에게 와서 문안인사를 했을 때 절구시를 써서 감사를 표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조재호(趙載浩)
1751년(영조 27) 9월 18일 경상도관찰사 조재호사천(泗川)에서 고성(固城)으로 오자 당시 백성의 실정(實情)을 알리고 어려운 처지를 해결해 달라고 청원서를 작성해 올렸다. 그리고 진주 향교에서 형차(刑差)가 난리를 일으킨 사건에 대해 본주(本州) 유생(儒生)들이 상소를 올릴 목적으로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냈는데 이에 대해 관찰사 조재호가 크게 노하여 통문에 연명한 170여 인을 모두 붙잡아 형추(刑推)하고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승총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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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건우
이진오(李晉吉)
1742년(영조 18) 12월 13일 고성 사또로 부임하였다. 구상덕1744년(영조 20) 3월 15일 타향에서 유리걸식하다가 서재(書齋)의 재직(齋直)이 된 남녀에 대해 잡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요청하는 청원서를 이진오에게 올렸다.
『승총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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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건우
배소사(裵召史)
구상덕1740년 4월 첫째 부인 밀성박씨가 죽고, 1747년 2월 재혼한 김해김씨가 죽었다. 그 후 구상덕의 나이 45세 때인 1750년 4월, 화곡(禾谷)에 사는 배소사(裵召史)를 집으로 맞이하였지만, 행실이 좋지 못하고 가족과 불화를 일으켜 부득이하게 내쫓았다. 이때 구상덕 배소사용전(龍田) 아래까지 전송하고, 그녀의 적종형(嫡從兄)인 배순석(裵舜錫)에게 편지를 보내 그간의 실정을 자세히 알리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구후청(仇厚淸)
구후청창원구씨로, 자(字)는 의호(儀浩)이다. 1668년 6월 23일에 태어나 1750년 8월 13일에 죽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구응성(仇應星)이 그의 고조(高祖)이며, 『승총명록』의 저자인 구상덕의 부친이다. 79세 때인 1746년에 회근례(回巹禮; 回婚禮)를 치렀고, 1748년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로 가자(加資)를 받았다. 특히 『승총명록』에는 회혼을 기념하는 잔치인 중뢰연(重牢宴)의 과정과 축하시가 다수 실려 있다.
『승총명록』
『도산실기(道山實記)』

집필자

김건우
구응성(仇應星)
구응성창원구씨로, 자(字)는 광삼(光三)이며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배(配)는 박대무(朴帶茂)의 딸인 숙인(淑人) 밀양박씨이다. 임진왜란 때에 아들 구동(仇棟)과 함께 창의(倡義)하였고, 의병장 곽재우 진영에 합류하여 공로를 세워 선무원종공신 2등의 공훈을 받았다. 창원구씨 후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였던 구응진(仇應辰)·구응삼(仇應參)·구응성(仇應星)·구동(仇棟)을 ‘일문사충(一門四忠)’이라고 칭하고 사당과 공적비를 세웠다. 구응성구상덕의 5대조이다.
『승총명록』
『철성지』

집필자

김건우
구동(仇棟)
구동창원구씨로, 자는 경우(擎宇)이며 호(號)는 모의당(慕義堂)이다. 배(配)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그는 21세에 부친 구응성(仇應星)을 따라 창의(倡義)하여 의병장 곽재우 진영에 들어가서 전공을 세웠다. 구상덕의 고조이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정창세(丁昌世)
정창세구상덕과 재종간으로, 구상덕에게 『통감』과 당시(唐詩) 등을 수학하였다. 특히 구상덕1728년 11월 18일 가르치고 있던 정창세와 김대흥(金大興)과 사미승(沙彌僧)에게 공부를 권면하는 글을 써서 주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윤덕휘(尹德輝)
윤덕휘가리동(加里洞)의 서당훈장으로, 여러 곳을 방랑하다가 고성으로 들어온 호남 출신의 인물이다. 구상덕이 가리동 부근을 갈 경우 그의 서당을 자주 방문하고 그 곳에서 유숙하였다. 구상덕1729년 2월 19일 송정(松亭)에 갔다가 가리동윤덕휘의 서당에 가서 시를 짓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이여섭(李汝涉)
이여섭구상덕의 매형으로, 거주지는 두포(頭浦)이며, 면임(面任)의 직임을 맡았다. 벽방산(碧芳山) 기우제를 치르기 위해 구상덕과 함께 안정사(安靜寺)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이여섭은 좌수 이경석(李慶錫)의 일로 검율(檢律)을 만나러 대구로 갔으며, 잘못된 군포 징발의 피해를 입었다. 이여섭의 막내아들이 갈산(葛山)에 사는 백준건(白俊建)의 사위이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류완재(柳完載)
류완재는 거주지가 계동(契洞)이며, 구상덕의 매형이다. 구상덕류완재를 위해 청원서의 초고를 써주기도 하였다. 1733년 8월 22일 류완재의 장례식 발인에 구상덕은 눈병으로 인하여 가지 못해 무척 통탄해 하였다. 그 후 1735년 3월 14일에 계동에 가서 류완재의 영전에 통곡하며 제문을 지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김백붕(金百朋)
김백붕은 천동(泉洞)에 사는 윤선(尹先)의 사위로, 구상덕과 교유하며 정수사(淨水寺) 등 산사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하였다. 1732년 4월 26일 용동(龍洞)에 사는 어린 자식인 수아(壽兒)가 두창에 걸렸을 때 구상덕김백붕 집에 머물러 있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이정규(李庭奎)
이정규1857년 7월 하순에 고성도산리(道山里)를 방문하였을 때 구상덕의 증손 구석검(具錫儉)의 부탁을 받고 『승총명록』 서문(序文)을 지어 주었다. 『승총명록』 마지막에 이정규의 글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서 자신을 ‘외손(外孫)’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구상덕 일가와 인척관계인 듯하다. 이정규의 저술로 2권 1책인 『가정유고(佳亭遺稿)』가 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조운규(趙雲逵)
1758년 3월 7일 관찰사 조운규(趙雲逵)가 관내를 순시할 적에 고성에서 관원과 아전들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횃불을 들게 하여 소요(騷擾)가 심하였다.
『승총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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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건우
이경석(李慶錫)
1726년 12월 7일 이경석은 별감에서 좌수로 올랐고, 좌수로서 고성사또 직임을 대행하기도 하였다.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경석이 감옥에 갇히자 구상덕이 면회하고 또한 매형 이여섭과 함께 검율(檢律)을 만나러 대구 감영으로 갔다. 그 후 광양(光陽)에 유배 갔던 좌수 이경석이 찾아와서 곡식을 빌어 갔기도 하였다. 그리고 1747년 9월 3일 구상덕이경석의 장례식에 조문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허석(許錫)
1732년 7월 18일 예조좌랑 이봉명(李鳳鳴)고성 사또로 임명되었으나, 지평 이수신(李綏身)의 상소에 의해 황간(黃澗) 사람 허석(許錫)으로 교체되었다. 이때 최원망(崔元望)을 대신하여 최섬(崔暹)이 좌수로 교체하였다. 1733년 9월 30일 세금을 미납한 일로 파직되고, 그 후에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승총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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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건우
유척기(兪拓基)
1727년 6월 20일 『승총명록』 기사내용 중 경상도관찰사 유척기가 파직되고 황선(黃璿)이 대신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는 소문을 기록하고 있다. 10년 뒤인 1737년 3월 10일에 조정에 출사(出仕)하지 않은 판윤 유척기를 특별히 경상도관찰사로 보임하였다. 1737년 8월 16일 구상덕은 농사에 관한 사안으로, 창녕현풍(玄風)을 경유하여 대구 감영에 들어가 관찰사 유척기에게 진정서를 올리려고 하였지만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그 때 마침 밀양사또였던 이광보(李光普)의 호상(護喪)이 있어 유척기가 조문하기 위해 그 곳을 지나가자 구상덕 일행은 길을 막고 진정서를 올렸다.
『승총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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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건우
조종도(趙宗道)
1737년윤9월 25일 고성 사또는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를 증직(贈職)하는 예식을 치르는데 봉함관(奉函官)으로 참여하기 위해 진주에 갔다는 내용이 『승총명록』에 실려 있다. 그리고 구상덕1756년 12월 9일 최익구(崔益九)의 청으로 조종도의 서손(庶孫)이라는 개가녀(改嫁女) 조아기(趙阿其)의 청원서를 대신 써주면서 조종도의 한시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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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건우
세동(細洞)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대가면금산리이다.
[관련내용]
세동에는 구상덕과 교유하던 전윤직(田允稷), 서이운(徐以運) 등이 거주하던 곳이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팔진역(八鎭驛)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합천군초계면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초계군(草溪郡) 소속으로, 초계군의 동쪽 5리에 위치하였다.
[관련내용]
구상덕의 첫째부인 밀성박씨(密城朴氏)의 친정이 있던 곳으로, 박씨 증조부가 이곳에 정착하였다. 구상덕개령(開寧) 감시(監試)를 치를 때에 경유하였고, 구상덕의 사내종 순이(順伊)와 계집종 금랑(今娘)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승총명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집필자

김건우
마암(馬岩)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마암면(馬岩面)이다. 고성읍에서 13km 동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회화면, 남쪽은 고성읍거류면, 서쪽은 대가면개천면, 북쪽은 구만면과 접하고 있다. 마암(馬岩)이라는 명칭은 마암면석마리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 옆에 화강암으로 만든 2구의 말(馬) 조각상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 말 조각상은 시도민속자료 제1호(경남)이다. 마을에서는 ‘마신’, ‘마장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관련내용]
마암에는 구상덕의 형님이 살았고, 또한 마암에는 강수룡(姜守龍)의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데, 1756년 윤8월 7일 구상덕이 그 곳 묘소를 둘러보고 왔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배둔(背屯)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회화면배둔리이다. 본래 고성군화양면(華陽面)의 한 지역으로, 배둔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배가 멈춘 형국과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각지의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정착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관련내용]
구상덕 당시에는 배둔에 역(驛)이 설치되어 있어 자주 그곳을 경유하면서 말(馬)을 먹이고 식사를 하였던 장소이다. 그리고 구상덕과 교유한 대장(代將) 성이전(成爾烇)과 장의(掌議) 최엽(崔曄)배둔에서 거주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정동(鼎洞)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고성읍동외리(東外里)이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인 고소산(高蘇山) 정상이 가마솥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정동(鼎洞)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관련내용]
구상덕은 인척(姻戚)간인 조카 박창주(朴昌周)의 집이 이곳에 있어 유숙하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용동(龍洞)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거류면신용리이다. 옛날 이곳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에서 용(龍)이 승천했다고 하여 ‘용(龍)’자를 따서 용마을이라 하였다.
[관련내용]
용동에는 구상덕의 매형인 윤영래(尹迎來)의 집이 있었고, 또한 처가가 있었으므로 자주 내왕하던 곳이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월치(月峙)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거류면은월리(銀月里)이다. ‘달(月)’자와 고개를 뜻하는 ‘치(峙)자’를 합하여 ‘월치(月峙)’라고 하였으며 월치고개 또는 달티고개라고도 부른다. 
[관련내용]
구상덕1751년 11월 11일 이엽천(李葉千)에게 16냥(兩)으로 월치의 상자(詳字) 논 8두락지를 매입하였다가 1755년 10월 26일에 40냥을 받고 팔았다. 그 중 8냥으로 정창윤(丁昌允)에게 도산(道山)의  상자(想字) 논 2두락지를, 15냥으로 정시열(丁時說)에게 동일한 들의 동자(同字) 논 3두락지를 매입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감동(甘洞)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마암면석마리이다. 마을에 감나무가 많아 시동(枾洞)이라고도 하였다.
[관련내용]
감동에는 족장(族丈)인 이국기(李國杞)가 거주하였다. 구상덕황치흥(黃致興)과 첨지 황계창(黃繼昌)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감동에 내방하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개천(介川)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개천면이다. 개천은 본래 진주목 지역으로서 그 후 고성군으로 편입되었다. 개천면고성읍에서 24.4㎞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마산시진전면, 남쪽은 구만면·마암면·영현면, 서쪽은 영오면, 북쪽은 진주시일반성면이반성면에 접하고 있다.
[관련내용]
구상덕합천 감시(監試)를 치르기 위해 1737년 9월 15일 진주개천을 경유하다가 전준필(全准必)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장산(獐山)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마암면장산리이다. 마을 뒤쪽 산의 형상이 노루가 누워있는 형태와 같다고 하여 ‘장산(獐山)’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천산재(天山齋)허천수(許千壽)의 문장(文章)이 유명해지면서 ‘장산(章山)’으로도 불리웠다.
[관련내용]
1729년 10월 21일 구상덕이 지인들에게『서전(書傳)』을 빌리기 위해 다니다가 장산에 거주하는 향원(鄕員)을 방문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옥천사(玉泉寺)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개천면북평리이다. 옥천사676년(문무왕 16)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 고려 진각국사(眞覺大師)가 중건한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해방 이전만 하더라도 옥천사 규모는 경상남도 지방에서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관련내용]
구상덕이 과거공부를 위해 벗들과 자주 거접(居接)하였던 산사(山寺)로, 그 곳의 승려들과도 지속적으로 교유하였다. 구상덕의 아들 구봉관(仇鳳觀)도 공부를 위해 옥천사에서 거접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가리동(佳里洞)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거류면이다.
[관련내용]
加里洞’이라고도 표기한다. 가리동은 장의(掌議)인 이용징(李龍徵)백봉년(白鳳年), 윤덕휘(尹德輝) 등의 인물이 저주하고 있던 곳이다. 구상덕1729년 2월 19일 가리동윤덕휘의 서당에 가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구상덕의 둘째아들 구봉관(仇鳳觀)가리동 서당에서 독서하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갈산(葛山)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거류면용산리이다. 본래 고성군광일면의 지역으로서 갈이 많았다고 하여 갈산이라 하였다. ‘갈촌(葛村)’이라고도 한다.
[관련내용]
갈산구상덕의 매형인 윤씨가 살고, 교유하던 최선여(崔善餘), 최석유(崔錫裕), 백준건(白俊建) 등이 거주하던 곳이다. 구상덕이 능화판(菱花板) 인쇄를 위해 그 곳에 가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곡산(曲山)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동해면내곡리이다. 이곳에 봉수대 터가 있다. 
[관련내용]
곡산에는 구상덕의 재종형(再從兄) 재원(再元)이 살았고, 생원 이여기(李汝杞)정태방(鄭台方) 등이 거주하였다. 그리고 최운회(崔運會) 모친의 산소가 곡산에 있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남포(南浦)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고성읍수남리이다. 고성군 최남단의 남쪽 포구마을이다.
[관련내용]
남포구상덕이 벗들과 배를 타고 노닐던 장소이며, 한시에 자주 등장하는 배경지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백사(白沙)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함안군가야읍사내리이다.
[관련내용]
구상덕함안백사리(白沙里)에 거주하던 송씨(宋氏)들과 교유를 맺고 있어 그 곳을 가면 유숙하였다.
『승총명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집필자

김건우
송도(松道)
[위치 및 유래]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이다.
[관련내용]
구상덕의 문생인 심도행(沈道行)의 집이 있어 종종 유숙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무기정(舞妓亭)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고성읍송학리이다. 무기산(舞妓山)이라고도 하며 고성현 북쪽 2리에 있다. 전설에 옛날 고주자사(固州刺史)가 기생들을 데리고 가무를 즐겼다고 하여 ‘무기(舞妓)’라고 이름하였다.
[관련내용]
구상덕은 이 곳을 자주 지나거나 유숙하였다. 1757년 1월 23일자 기사내용에 무기정에서 큰 화재가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승총명록』
『여지도서(輿地圖書)』

집필자

김건우
은정(銀亭)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거류면은월리이다.  
[관련내용]
거류산아래에 위치한 은정에서는 활쏘는 장소가 있어 무인들이 무과시험을 보거나 시합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동제(洞祭)를 치른 내용이 자주 나오는데, 은정에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구상덕이 축문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국가적 조사(弔事)가 있을 경우 망곡례(望哭禮)를 행하던 장소이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안간역(安磵驛)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진주시미천면안간리이다. 안간역은 주의 북쪽 42리에 있다. 사근도(沙斤道)에 속했으며 옛날에는 관(館)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초사(草舍)를 안간역 앞에 옮겨 지었다.
[관련내용]
『승총명록』에는 ‘안간역(安干驛)’으로 표기되어 있다. 1725년 8월 18일 구상덕신당서원(新塘書院)에 유숙할 때 안간역에서 말(馬)을 먹였다.
『승총명록』
『진양지』

집필자

김건우
영이곡(永耳谷)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영오면성곡리이다. 본래 진주목영이곡면(永耳谷面)이었는데 구한말에 고성군으로 편입되었다.
[관련내용]
영이곡에는 구상덕의 팔촌동생 세항(世恒)이 거주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우산(牛山)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고성읍우산리이다.
[관련내용]
구상덕우산에 사는 좌수 이석점(李錫漸)이 며느리를 맞이하는 예식을 보기 위해 가기도 했다.
『승총명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양지』

집필자

김건우
창선(昌善)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남해군창선면이다. 창선은 바로 창선도(昌善島)로, 원래 진주목 소속이며 흥선도(興善島)라고도 한다. 진주목 남쪽 90리의 해중에 있다. 봉우리가 솟아 있어 대방산이라고 이르며 둘레가 120리다.
[관련내용]
1735년 2월 13일 구상덕은 사내종 늦산(莻山)을 데리고 빌려준 돈을 추심하려고 남해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창선(昌善)을 경유하였다.
『승총명록』
『진양지』

집필자

김건우
갈마포(渴馬浦)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삼산면판곡리이다. 전설에 어떤 대인(大人)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말이 목이 말라서 가지 못했는데 조그마한 샘을 발견하여 목마름을 면하였으므로 ‘갈마포(渴馬浦)’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관련내용]
구상덕은 지사(地師) 이경래(李慶來)와 함께 산소를 구하기 위해 다니다가 갈마포(渴馬浦)에 도착해 땅을 점지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파산(巴山)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함안군여항면이다. 파산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함안의 진산인 여항산(艅航山, 餘航山) 동쪽에 마주한 파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관련내용]
경상도 관찰사나 도사(都事)가 주관하는 시회(試會)가 파산에서 자주 열렸다. 구상덕은 생도들과 진해읍에서 유숙하였다가 파산의 시소(試所)에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파산에는 구상덕의 지인 윤상신(尹商臣)의 집이 있었다.
『승총명록』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안군읍지』

집필자

김건우
화현(花縣)
[위치 및 유래]
위치는 대구광역시달성군화원읍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대구도호부화현내(花縣內)로, 화원(花園)이라고도 하였다.
[관련내용]
1743년 7월 10일 대구 감영에서 백일장이 열려 구상덕김백삼(金伯三)백봉래(白鳳來)와 동행하여 함안 등지를 경유하여 화현의 주점에서 말(馬)을 먹이고 대구 서문(西門) 안에 유숙할 장소를 잡았다.
『승총명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집필자

김건우
황리(黃里)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통영시광도면이다. 고성군과 경계를 이루는 통영시 동북쪽에 위치한 황리는 원래 고성현에 속했다.
[관련내용]
황리에는 좌수 허표(許標)가 임시로 마련한 거처가 있었다. 구상덕은 좌수 허표가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고 함벽정(涵碧亭)에 대한 시를 썼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차운시를 지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화곡(禾谷)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마암면화산리이다.
[관련내용]
구상덕의 나이 45세 때인 1750년 4월에 화곡(禾谷)에 사는 배소사(裵召史)를 집으로 맞이하였지만 가족과 불화를 일으켜 부득이하게 내쫓았다. 참고로, 구상덕1740년 4월 첫째 부인 밀성박씨가 죽고, 1747년 2월 재혼한 김해김씨가 죽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율대(栗垈)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고성읍율대리이다. 율대는 원래 고성군 동읍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밤처럼 생겼다 하여 밤디밤대 또는 율대라 하였다.
[관련내용]
『승총명록』에는 ‘율대(栗代)’라고 표기되어 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와룡동(臥龍洞)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하이면이다. 와룡산(臥龍山)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경상남도사천시사천읍사남면에도 와룡산이 있다. 고성사천와룡산 모두 고려 현종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온다.
[관련내용]
와룡동에는 도유사 이담년(李聃年)이 거주하였다. 구상덕와룡동에 사는 첨지 이송년(李松年)이 조정으로부터 노인직(老人職)을 받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연회에 가서 한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그리고 와룡산의 중 원숙(元淑)의 시고(詩藁)에 화운시(和韻詩)를 지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반성(班城)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진주시반성면이다. 반성현진주의 동쪽 52리에 있다. 고려 현종 때에 내속되어 별호를 편월(片月)이라고 했으며 의창(義倉)이 있다.
[관련내용]
반성에는 장의(掌議) 최석몽(崔錫夢)이 거주하였는데, 최석몽구상덕에게 와서 ‘인(人)’자 운으로 화답을 구하는 시를 요청하여 화운(和韻)하였다.
『승총명록』
『진양지』

집필자

김건우
상족암(床足巖)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하이면덕명리 일대이다. 바닷가 암벽은 겹겹이 층을 이루는 모습이 밥상다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상족(床足)이라고도 하고, 여러 개의 다리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쌍족(雙足)이라고도 부른다. 상족암 앞에는 공룡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관련내용]
구상덕상족암을 자주 유람하고, 7언율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관원을 따라 기우제의 제물(祭物)을 봉안하기 위해 상족암에 갔다. 우후(虞候) 정찬(鄭纘)은 기생을 데리고 상족암에 가서 노닐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가동(可洞)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대가면금산리이다.
[관련내용]
가동에는 강성주(姜聖周), 강도희(姜道羲), 제하백(諸夏伯), 제하봉(諸夏封) 등이 거주하였다. 그리고 구상덕은 묏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가동에 왕래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갈천(葛川)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대가면갈천리이다. 갈천리는 본래 고성군 대둔면의 지역으로서 갈라진 내(川)가 있으므로 갈내 또는 갈천이라고 하였다.
[관련내용]
구상덕은 제향에 참여하기 위해 대가면 갈천리에 있는 갈천서원에 자주 내왕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전도(錢島)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 동해면내산리이다.
[관련내용]
전도는 돈섬이라 불리운다. 『승총명록』에는 구상덕의 친구 최석권(崔錫權)이 이곳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갈곡(葛谷)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진주시진성면구천리이다.
[관련내용]
갈곡구상덕의 첫째아들 구봉정(仇鳳鼎)의 처가가 있던 곳으로, 아들과 며느리가 자주 그 곳에 왕래하였다. 구봉정의 장인 밀성(密城) 박하중(朴夏中)은 갈곡에 거주하며 구상덕과 자주 교유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와도(臥島)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삼산면두포리이다. 와도는 ‘누은섬’이라고 하는데 문래섬 남쪽에 있다.
[관련내용]
1753년 7월 28일 삼봉포(三峯浦)에 유숙하고 다음날 배를 타고 와도에 갔는데 비바람이 크게 불어 하선하기 어려웠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굴량(堀梁)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통영시명정동이다.
통영 서쪽 5리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구가 길을 파서 배가 지나다니게 하고 다리를 만들면서 이름을 굴량교(堀梁橋)라고 하였다.
[관련내용]
『승총명록』 1758년 5월 25일 기사내용에 굴량(堀梁)이 이번달에 메워져 평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승총명록』
『경상도읍지』

집필자

김건우
동물곡리(冬勿谷里)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진주시하촌동이다.
주의 북쪽 5리에 있다. 동쪽은 비라곡(非羅谷), 남쪽은 비봉산(飛鳳山), 서쪽은 성태동(省台洞), 북쪽은 모태곡(毛台谷)이다. 동물곡리(冬勿谷里) 또는 동물곡(冬勿谷)이라고 한다.
[관련내용]
동물곡리 기동(基洞)에는 구상덕의 인제(姻弟) 박동욱(朴東郁)이 살고 있었고, 비(婢) 귀대(貴代)의 비부(婢夫) 이백지(李白只)의 집이 있어 유숙한 적이 있다.
『승총명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집필자

김건우
거운지(巨云地)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고성읍월평리이다.
옛날에 거운지(巨云池)라는 못이 있고, 앞에는 들판이 있었다. ‘巨雲地’라고도 표기한다.
[관련내용]
『승총명록』에는 ‘巨云之’로 표기되어 있다. 경상도 도사(都事) 남태제(南泰霽)고성 오리정(五里亭)에서 거운지 들판으로 향해 갔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신당서원(新塘書院)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진주시 집현면이다. 신당서원1718년(숙종 44) 9월 12일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사액한 서원이다.
[관련내용]
구상덕개령에서 감시(監試)를 치르고 1725년 8월 18일 신당서원을 방문하여 유숙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화산서원(華山書院)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이다. 1474년(성종 5) 회헌(晦軒) 임대동(林大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관련내용]
구상덕은 개령에서 감시(監試)를 치르고 1725년 8월 16일 화산서원을 방문하고 그 곳에서 유숙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청곡사(靑谷寺)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진주시 금산면 갈전리이다. 월아산(月牙山) 서쪽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중건되었다.
[관련내용]
1729년 6월 8일 구상덕과 벗들이 과거공부 장소를 옥천사(玉泉寺)에서 청곡사(靑谷寺)로 옮겼다.
『승총명록』
『진양지』

집필자

김건우
신리(新里)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마암면신리이다.
[관련내용]
구상덕1727년 7월 4일 신리(新里)에 사는 점쟁이 김여필(金汝必)에게 점을 치는 일을 부탁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견내량(見乃梁)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거제시사등면덕호리경상남도통영시용남면장평리 사이이다. 임진왜란 때는 옥포해전과 한산해전의 주요 전투지이다.
[관련내용]
『승총명록』에는 김윤전(金允全)이 미역을 채취하기 위해 견내량으로 향한 기록이 있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거류산(巨流山)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고성군거류면이다. 거류산고성의 진산(鎭山)이며, 높이는 약 570m이다. 동쪽은 당동만, 서쪽은 고성읍, 동북쪽은 동해면, 남쪽은 통영시광도면에 접해있다.
[관련내용]
거류산아래 구상덕과 그 일가가 살았던 마을이 있었다. 기우제를 올리기 위해 축문을 지어 거류산에 오르기도 하였다.
『승총명록』

집필자

김건우
안정사(安靜寺)
[위치 및 유래]
위치는 경상남도통영시광도면안정리이다.
[관련내용]
구상덕이 젊은 시절부터 과거공부를 위해 다니던 산사(山寺)로, 인근 양반들과 교유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구상덕 집안은 안정사의 중들과는 수시로 내왕하며 서로 조력(助力)하였다. 『승총명록』에 ‘安靜寺’, ‘安精寺’, ‘安井寺’, ‘安寺’라고 표기되어 있다.
『승총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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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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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월봉(月峯) 구상덕(具尙德, 1706~1761)이 1725년 7월 29일부터 1761년 8월 25일까지 37년간 고성 지역을 배경으로 쓴 생활일기.
원자료제목
· 표제勝聰明錄
[내용 및 특징]
『승총명록』구상덕1725년 7월 29일부터 1761년 8월 25일까지 37년간 기록한 농촌생활일기이다. 18세기 경상남도고성지역을 중심으로 한 농촌사회의 구체적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경상남도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구상덕의 선대는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한 구응진(仇應辰)·구응참(仇應參) 형제와 그 종제인 구응성(仇應星), 그의 아들 구동(仇棟) 등이 비교적 알려진 인물들이다. 원래 창원에서 세거하던 구씨고성현광일면(光一面)도산리(道山里)로 이주한 인물은 선조(宣祖) 때인 구명람(仇明覽)으로, 구상덕의 6대조이다. 병화(兵火)로 집안이 큰 타격을 입고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주한 뒤 고성에서 창의(倡義)한 선조들의 활약으로 인해 3대에 걸쳐 증직(贈職)을 받았다. 하지만 출사(出仕)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아 구상덕 이후 점차 향촌의 한족(寒族)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구상덕이 거주했던 도산리는 읍내로부터 동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으로, 거류산(巨流山) 남쪽과 통영과 경계를 이루는 벽방산(碧芳山) 사이에 위치해 있다. 즉 구상덕의 거주지는 고성 읍내로부터 통영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일기를 보면, 거제진주가 그 생활반경에 들어 있었으며 대구 감영 지역까지 그의 활동범위로 볼 수 있다. 다음은 『승총명록』 각 책마다 작성시기와 저자의 나이를 정리한 것이다.
 제1책: 1725년(20세)~1731년(26세)
 제2책: 1732년(27세)~1737년(32세)
 제3책: 1738년(33세)~1749년(44세)
 제4책: 1750년(45세)~1755년(50세)
 제5책: 1756년(51세)~1761년(56세)
『승총명록』의 서지적 측면을 살펴보면, 각 책의 표지에 서명(書名)이 있고, 표지 이면에는 일기의 작성연대를 서기(西紀)로 환산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전사본이 완성된 이후에 후대에 가필된 것이다. 가필된 부분은 이 외에도 일기가 시작되기 이전 부분의 기록인 권별 간지표(제1책과 제2책)나 권차(卷次)와 장수(張數) 표기, 각종 첨지, 장차(張次) 표기 등이 있다.
 매 책마다 처음이나 마지막 부분에 한시(漢詩)나 서문(序文) 등이 있다. 제1책의 홍문관소(弘文館疏), 율곡소어(栗谷疏語) 등은 저자 구상덕 개인이나 본 일기의 내용과는 전혀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이외에도 본문에는 가필자가 서미(書尾)에 작성한 두주(頭註)나 첨지의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형태는 전사(轉寫)한 이후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그 과정에 여러 번의 가필이 이루어진 것이다. 구상덕의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원래 ‘仇氏’였으나 정조(正祖)가 ‘具氏’로 사성(賜姓)하여 정조대 이후에는 모두 ‘具氏’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승총명록』에는 ‘仇氏’로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전사시기 역시 정조 이전으로 추정된다.
또한 제4책의 마지막에 있는 ‘이호자사순유별장병서(李顥士淳留別章並序)’는 진주에 거주하는 이호(李顥)1755년 7월 5일에 고성지역을 방문하고 머물러 있다가 사마시(司馬試) 응시를 위해 8월 2일 떠나면서 남긴 이별시에 덧붙인 것이다. 일기의 본문에는 8월 2일 이호의 이별시에 차운한 구상덕의 한시만 실려 있고, 당시 이호의 시와 서문이 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이는 일기의 본문에서 미처 싣지 못하고 있던 것을 전사할 때 제4책 마지막 부분에 실은 것으로 추정된다.
『승총명록』의 구성체제를 보면, 구상덕은 매년 초에 24절기의 날짜를 기록해 놓았고, 매달이 시작될 때마다 그 달에 있는 절기를 다시 기록했으며 매일의 간지와 날씨의 변화를 기록하였다. 또한 연말에는 그 해의 농사작황과 물가, 기후변화 및 병충해 등의 재해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했다. 이를 통해 『승총명록』의 자료적 특징이 농사와 기후, 물가임을 알 수 있다.
구상덕은 자주 통영과 본읍의 관아를 출입하며 현판, 전문(箋文), 축문(祝文)을 작성하는 등 지역 사회에는 글을 잘하는 인사로 인정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고성지역에 편중된 부담과 백성의 고충을 해결해 달라고 관아와 경상도관찰사에게 여러 번 청원서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구상덕고성향교와 교생(校生)에 관한 문제에 대해 관아에 의사전달을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등 지속적으로 대관((對官)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하는 모습을 『승총명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구상덕은 교육을 강조하며 젊은 시절부터 산사(山寺)에 거접(居接)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후 용암서재(龍巖書齋), 월봉서재(月峯書齋)를 설립하여 인근지역의 학생들을 모아 교육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용암서재가 불탄 후 1754년 1월에 도산리 촌민들의 조력으로 중수를 시작하여 그 해 3월에 월봉서재를 완성하였다. 학생들의 면모를 보면, 친인척을 비롯하여 향리자제, 평민, 승려 등 다양하였다.
그리고 후서(後序)는 특별한 제목이 없이 제5책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데 문장의 끝에 ‘외손이정규근서(外孫李庭奎謹序)’라고 쓰어 있어 이정규(李庭奎)가 찬술했음을 알 수 있다. 구상덕 사후 100여년이 지난 시점에 구상덕의 증손자 구석검(具錫儉)이 그에게 일기를 보여준 일화와 그 내용이 사서(史書)로서 요건을 갖추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자료적 가치]
본 일기자료는 고성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의 물가변동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기록하여 당시대의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서당교육, 관혼상제, 기후변화와 작황, 지방여론 동향 등 일상생활의 온갖 일들을 여과 없이 기술하고 있어 사료에서 볼 수 있다. 18세기의 경제사·사회사·민속사·교육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주기사항

제1책 권두: 此壹卷 公自二十歲乙巳 至二十六歲辛亥七年間 日記也 但辛亥年 細不日記 大畧月記 冊章七十八枚
제2책 권두: 此貳卷 公自二十七歲壬子 至三十二歲丁巳 六年間日記也 冊章七十五枚
제3책 권두: 此參卷 公自三十三歲戊午 至四十四歲己巳 十二年間日記也 冊帳壹百七枚
제4책 권두: 此四券 公自四十五歲庚午 至五十歲乙亥 六年間日記也     冊帳六十二枚
제5책 권말: 歲在丁巳七月下澣 外孫李庭奎謹序

참고문헌

정순우 「『승총명록』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전성호 「1725~1761년간 경상도 고성지방의 물가수준에 관한 연구-경상도 고성현 『승총명록』분석-」 『태동고전연구』제13집, 1996.
전성호 「朝鮮後期 米價史 硏究」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이명희 「朝鮮後期 共同體 倫理規範의 特性에 관한 연구-『勝聰明錄』과 南平文氏古文書를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0.
김엘리 「영조대 경상도 고성의 진휼시책에 관한 연구-『승총명록』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집필자

김건우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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