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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일록(東槎日錄)

자료명 동사일록(東槎日錄) 저자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유형분류 고서/일기 주제분류 개인/생활/일기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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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일기
· 내용분류 개인-생활-일기
· 작성지역 한성 (현재주소: 서울)
· 작성시기 1596 (만력병신)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형태사항

· 크기(cm) 28cm X 17.5cm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冊 61張
· 판식 無郭, 無版心, 無絲欄
· 재질 종이
· 표기문자 한자
· 인장 1 (적색, 정방형, 2x2cm, 韓國精神文化硏究院藏書印)
· 인장 2 (적색, 정방형, 2.2x2.2cm, 安春根印)

· 안내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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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동사일록(東槎日錄)
『동사일록(東槎日錄)』은 조선시대 문인 추포(秋浦) 황신(黃愼, 1560~1617)이 1596년(선조 29) 8월 3일에서 12월 9일까지 명나라책봉사(冊封使)양방형(楊方亨)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황신이 1596년 일본으로 사신을 떠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과의 강화(講和)협상으로 인한 부득이한 파견이었다. 일본에서 황신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명나라 사신이 가지고 온 문서에 도요토미히데요시(風臣秀吉)를 일본 국왕으로 삼는다는 문구만 있었을 뿐, 히데요시가 자신이 요구한 조건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이에 격분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하겠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황신의 사행 또한 난처한 위치에 있었지만 황신은 통신사로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그 책임을 다하려 하였다.
이 일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와 일본 간의 화의책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외교사적 연구에 도움을 주고있다. 또한 당시의 통신사(通信士) 파견이 기존 통신사 파견과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통신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집필자

박진성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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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황신(黃愼)이 1596년 8월 3일에서 12월 9일까지 명나라 책봉사(冊封使)를 따라 일본에 다녀온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東槎日錄
· 내제萬曆丙申秋冬通信士一行往還日記
[내용 및 특징]
『동사일록(東槎日錄)』은 조선시대 문인 추포(秋浦) 황신(黃愼, 1560~1617)이 1596년 8월 3일에서 12월 9일까지 명나라책봉사(冊封使)양방형(楊方亨)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일과 이후 부산왜영(釜山倭營)에서 머무는 동안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황신(黃愼)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사숙(思叔), 시호는 문민(文敏)이며, <인명>성혼(成渾)과 <인명>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평(持平)에 기용, 당시 세자였던 <인명>광해군(光海君)를 따라 남하하여 체찰사(體察使)의 종사관을 지냈고, 두 차례나 왜영(倭營)에 다녀온 뒤에, <관직명>통신사(通信士)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따라 일본에 갔다 왔으며, 강화가 결렬되었으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관직명>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공조(工曹)⋅호조(戶曹)참판, <관직명>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대사간(大司諫)을 역임, <관직명>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인명>문경호(文景虎)에게 지탄받는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명나라에 사신 간 사이에 전일의 일로 해서 <인명>정인홍(鄭仁弘)에게 탄핵받아 삭직되어 <지명>강화(江華)에 가서 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복관되었으나 대신 <인명>유영경(柳永慶)이 막아 <지명>부여(扶餘)에 내려가 살았다. 광해군 2년에 호조 참판으로 <관직명>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인명>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나라명>명에 다녀왔고, 광해군을 시종했던 공으로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에 봉작되었다가,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인명>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인명>정협(鄭俠)의 무고로 <지명>옹진(甕津)으로 유배된 지 5년 만에 일생을 마쳤다.
황신(黃愼)이 1596년 일본으로 사신을 떠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과의 강화(講和)협상으로 인한 부득이한 파견이었다. 명과 일본은 4년에 걸쳐 진행된 협상을 일단 마무리하기 위해 조선의 통신사도 동행할 것을 요구하였고, 강화에 반대하던 조선 측은 마지못해 황신을 정사(正使)로 하는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는 이전까지 교린(交隣)을 목적으로 했던 통신사 파견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통신사 파견 이전인 1595년 11월 황신은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으로 심유경(沈惟敬)접반관(接伴官)으로 있었다. 조정에서는 같이 왜영(倭營)에 들어가 적정(賊情)을 탐지하도록 명하고 심유경도 우리나라에서도 통신사를 같이 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황신은 논쟁을 통해 거부의사를 밝혔다. 선조(宣祖) 역시 강화에 반대하여 사신파견을 윤허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유경 등이 누차 우리 사신이 동행할 것을 촉구하고 대신들과 비변사(備邊司) 여러 신하들이 자주 계청(啓請)하여 결국 사신 파견이 결정되었고 다음 해 5월에 정사(正使)부사(副使)를 결정함에 당시 왜영(倭營)에 있던 황신이 사행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장서각 소장 『동사일록(東槎日錄)』은 이상의 정치적 배경 하에 파견된 일본 사행의 성과와 함께 일본의 풍속․지리․제도와 같은 물정에 대한 정보도 함께 기술되어 있다. 이 일기의 이본으로는 규장각 소장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奎7019)가 있다. 기록시기나 내용에서 약간 차이를 보이지만 『동사일록』의 내제 또한 ‘萬曆丙申秋冬通信士一行往還日記’라 되어 있다.
1책 61장의 한문필사본으로 판식이 없는 용지에 필사되어 있으며 맨 앞장에는 범례가 기록되어 있어 필사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범례에 따르면 이 일기의 원본은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인해 실전(失傳)되었으며 지금의 필사본은 선생의 족손(族孫) 황치(黃杘)의 집에서 소장하고 있던 본을 산인(山人) 진일(眞一)이란 인물이 초록해 둔 것이라 하였다. 일기의 말미에 부록한 관제(官制)․도로(道路)․방역(方域)에 대한 정보는 강항(姜沆)『간양록(看羊錄)』 영향을 받아 작성된 것임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범례의 마지막에 ‘己亥閏月’이라하여 필사시기를 적어두었는데 시기상으로 1659년임을 알 수 있다.
범례에 이어 총원 309명으로 구성된 통신사의 명단과 구성원을 기록하였다. 이후 8월 3일부터 일기의 본 내용이 시작된다. 주요 일정 및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월 3일 부사(副使)경주(慶州)로부터 국서(國書)를 받들어 부산에 이르러 4일에 출항하였다. 8월 10일 대마도(對馬島) 부중(府中)에 이르러 8월 24일까지 머물렀다. 8월 25일 대마도를 떠나 8월 29일 나고야(浪古耶)에 이르러 육지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윤 8월 18일 界濱에 도착하여 심천사(沈天使; 沈惟敬)양천사(楊天使; 楊方亨)의 아문(衙門)에서 머물렀다. 이후 9월 9일 명나라 조사를 따라 배에 오르기까지는 명나라 천사(天使)들이 오사카(五沙盖)에서 일본의 관백(關白)도요토미히데요시(風臣秀吉)와 회담한 내용이 주로 실려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 황제의 책봉을 받는 의식은 거행했지만 황신(黃愼) 일행은 만나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사(使事)의 성과없이 9월 9일 명나라 천사들과 함께 배에 올라 界濱을 떠났다. 10월 9일 나고야와 25일 대마도를 거쳐 11월 23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후 12월 9일까지 부산 왜영(倭營)에 머물렀다. 마지막날 왜영을 떠나며 일본사행의 총 여정 및 거리를 정리하고 있으며 일본의 산천(山川)․풍속(風俗)․지리(地理)․관제(官制)․녹목(祿目)․법제(法制)․인성(人性) 등에 대한 정보도 부기하였다. 또한 일본 천황 및 관백에 대한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에서 황신(黃愼)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명나라 사신이 가지고 온 문서에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삼는다는 문구만 있었을 뿐, 히데요시가 자신이 요구한 ‘명과의 무역재개’, ‘조선 남부 4도의 할양’ 등의 요구 조건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이에 격분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하겠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오사카 주변에서는 ‘히데요시가 조선 사절 일행을 전부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황신을 따라간 수행원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으나 황신은 오히려 사신으로 온 이상 일본의 재침 계획을 본국에 알리고 그에 대비할 수 있도록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고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히데요시의 부하 平調信이 황신에게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다. 선조를 설득하여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일본에 보내거나 정기적으로 사신과 예물을 보내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황신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9월 9일 귀국길에 올랐다.
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서울로 올라온 후 황신은 강화의 결렬로 사행의 임무을 마치지 못했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선조는 홀로 많은 수고를 하였다며 상을 내렸다. 선조가 만일 이번 사행의 일을 성공시켰다면 오히려 상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 점에서 표면적 의도와 달리 조선국왕은 강화를 원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황신의 사행 또한 난처한 위치에 있었지만 황신은 통신사로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그 책임을 다하려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일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 명과 일본 간의 화의책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외교사적 연구에 도움을 주고있다. 또한 당시의 통신사 파견이 기존 통신사 파견과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통신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국역 해행총재; 일본왕환일기』 민족문화추진회, 1974
한일공통역사교재 제작팀 『조선통신사』 한길사, 2005
조정효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의 사행문학적 성격 연구」 『문창어문논집』 47호, 문창어문학회, 2010

집필자

박진성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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