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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장황제예릉추숭비(哲宗章皇帝睿陵追崇碑)

자료명 철종장황제예릉추숭비(哲宗章皇帝睿陵追崇碑) 저자 이변(李昪), 김씨(金氏), 김학진(金鶴鎭), 이중하(李重夏),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15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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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
· 작성시기 1908
· 비고 2-5315
1908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변(李昪)
김씨(金氏)
김학진(金鶴鎭)
이중하(李重夏)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199.1 X 72.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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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철종(哲宗)과 철인왕후(哲仁王后)를 각각 황제와 황후로 추존하면서 예릉(睿陵)에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철종장황제예릉추숭비(哲宗章皇帝睿陵追崇碑)
[내용 및 특징]
1908년(융희 2)에 조선 제 25대 국왕 철종(哲宗, 1831~1863)을 장황제(章皇帝)로 추존하고, 철인왕후(哲仁王后)를 장황후(章皇后)로 추존하면서 예릉(睿陵)에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이다. 장서각에는 전면과 음기 모두 2본씩 소장되어 있다. 전면은 ‘대한/철종장황제예릉/철인장황후부좌(大韓/哲宗章皇帝睿陵/哲仁章皇后祔左)’가 3줄에 걸쳐 쓰여 있다. 전형적인 소전(小篆)으로 매 글자마다 직방형(直方形)의 격식을 유지하였다. 표석의 건립시기는 1908년(융희 2)이고, 위치는 고양시 원당읍 서삼릉이다.
음기의 내용은 융희 2년(1908) 철종과 철인왕후를 각각 ‘장황제(章皇帝)’와 ‘장황후(章皇后)로 추존한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맨 앞에 추상존호가 길게 나열되어 있고, 생년과 책봉 및 승하 일시, 장지 등이 시기별로 기술되어 있다.
이 비문의 내용과 체제가 동일한 『예릉비』(2-3967)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탁인본으로 이 표석과 같은 시기에 간행된 것이다. 이 첩의 마지막 부분에는 “음기찬진관(陰記撰進官) 종일품 숭정대부 규장각대제학 신 김학진(從一品 崇政大夫 奎章閣大提學 臣 金鶴鎭) 전후면 서사관 정이품 정헌대부 장예원경 신 이중하(前後面 書寫官 正二品 正憲大夫 掌禮院卿 臣 李重夏)”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이 비문의 찬자는 이학진(1838~1917)이며, 서자는 이중하(1846~1917)임을 알 수 있다.
1908년 철종과 철인왕후를 추존할 때의 기록으로 『추존시의궤(追尊時儀軌)』(2-4830)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의궤는 진종(眞宗), 헌종(憲宗), 철종(哲宗) 등 세 왕과 왕비에 대한 추존의식을 조목별로 나누어 기록한 것이다. 특히 표석의 신건(新建)이나 개건(改建) 등에 관한 절차를 알려주는 「표석소의궤(表石所儀軌)」가 있어 이 비를 건립한 당시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철종의 이름은 변(昪)이며 초명은 원범(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 1755~1801)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曠, 1785~1841)의 셋째아들이다.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이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懷平君 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明純王后)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하였다. 이듬 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 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다. 또 그 해 여름에 한재가 심한데도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깝게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 욕심이 많고 비리를 저지름)의 징벌을 엄명하였다.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만에 3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했을 뿐 후사가 없었다.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철인왕후의 성은 김씨(金氏)로 본관은 안동이며,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 1801~1863)의 딸이다. 1851년(철종 2)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878년(고종 15)에 사망하여 예릉에 안장되었다. 존호는 ‘명순휘성정원수녕(明純徽聖正元粹寧)’이며, 휘호는 ‘경헌(敬獻)’, 전호는 ‘효휘(孝徽)’이다. 1908년(융희 2)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로 추존되었다.
장서각에는 《철종장황제예릉추숭비(哲宗章皇帝睿陵追崇碑)》 외에도 《철종대왕예릉비(哲宗大王睿陵碑)》(1864년), 《예릉지(睿陵誌)》(1878년), 《철종예릉지(哲宗睿陵誌)》(1908년) 등이 소장되어 있어 예릉 관련 금석문 일괄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 선포 이후 왕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각종 추숭사업과 금석문의 제작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예릉비(睿陵碑)』(장서각 2-3969) /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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