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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자료명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저자 민씨(閔氏), 이척(李坧),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17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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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여주 능현리 (현재주소: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 작성시기 1904
· 비고 2-5317
190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민씨(閔氏)
이척(李坧)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跡碑)
· 크기(cm) 201.5 X 68.8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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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고향에 세운 기념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내용 및 특징]
명성황후가 태어나 살았던 생가의 옛 마을을 기리기 위해 1904년(고종 41)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에 세운 기념비의 탁본이다. ‘탄강(誕降)’은 왕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뜻하고, ‘구리(舊里)’는 고향의 뜻으로 명성황후탄강구리비는 황후가 탄생한 옛 마을이란 뜻이다. 원래 이 자리에 명성황후가 어린 시절에 공부하던 별당이 있었으나 1895년 동학농민혁명 때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68㎝, 방형기단석(方形基壇石) 위에 세워진 비신(碑身)의 높이는 150㎝, 너비 64㎝, 두께 46㎝이다.
전면과 음기가 있으나 장서각에는 전면의 탁본만이 전한다. 전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라 씌여 있는데, 순종의 어필로 전하고 있다. 규장각에는 절첩형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음기의 내용은 ‘광무 팔년 갑진 오월 일 배수음체경서(光武 八年 甲辰 五月 日 拜手飮涕敬書’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비명에 쓰러진 명성황후를 기리는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비석은 현재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에 위치해 있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낳았는데, 맏아들과 셋째 대군, 넷째 대군, 그리고 공주는 모두 일찍 죽고 둘째아들 이척(李坧)만이 살아남아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이가 곧 순종이다. 황후는 왕비로 책봉된 후 별관에 있으면서 『소학』, 『효경』, 『여훈』 등의 책을 밤이 깊도록 손에서 놓지 않았음은 물론 『사기』에도 통달하여 백관의 장주(章奏)를 친히 보았다. 황후는 자신의 지적 토대와 지식을 기반으로 고종의 정치적 결단과 판단에 도움을 주는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나아가 여흥민씨의 중심인물로 양오라버니 민승호(閔升鎬)를 비롯, 그의 친동생 민겸호(閔謙鎬), 딸이 세자빈에 책봉된 민태호(閔台鎬)와 그 아들 민영익(閔泳翊) 등과 차례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일족을 정치일선에 끌어들였다.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개화시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갈등의 여파로 일어난 임오군란의 와중에서 선혜청 당상을 맡고 있던 민겸호가 죽임을 당하는 등 민씨 일족이 부패탐학한 집단으로 지목되자 황후는 성난 군중을 피해 장호원으로 일시 피난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내적으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등 정치적 풍상을 겪으면서 외적으로는 고종과 함께 열강의 정치 경제적 침투를 막아내고자 외교노선을 다변화하였다. 청일전쟁이 진행되면서부터 일본이 노골적인 침략적 간섭을 통해 갑오개혁을 추진시키자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기 위해 친러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외교정책을 변화시킨 중심인물로 황후를 지목하고 그들의 앞날에 걸림돌인 황후를 시해하기로 계획하여 을미사변을 일으킨 결과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경운궁에서 승하한 후 고종의 능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새로 조성하면서 명성황후의 능도 함께 모셔와 3월 4일 서향 언덕에 합장하여 장사지냈다.
고종은 현명하고 슬기로운 황후가 옆에서 정사를 도와주고 보좌하다가 을미사변이라는 엄청난 일을 당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홀연히 떠나간 데 대해 회한에 가득 찬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자신의 문집인 『주연집(珠淵集)』에 황후를 위한 제문 13편을 통해 황후에 대한 사랑과 회한을 표현하였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도 고종의 황후에 대한 회한으로 제작되었다. 비석의 글씨는 아들 순종이 직접 쓴 것으로 전하는데 많지 않은 그의 어필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비문의 서체는 단정하고 큰 해서체이다. 비석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 선포 이후 명성황후에 대한 추숭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帖裝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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