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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익황제수릉추숭비(文祖翼皇帝綏陵追崇碑)

자료명 문조익황제수릉추숭비(文祖翼皇帝綏陵追崇碑) 저자 이영(李旲), 김씨(金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09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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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7-2)
· 작성시기 1902
· 비고 2-5309
1902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영(李旲)
김씨(金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68.3 X 97.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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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에 익종(翼宗)과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묘호(廟號)와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표석(表石).
원자료제목
· 표제문조익황제수릉추숭비(文祖翼皇帝綏陵追崇碑)
[내용 및 특징]
1902년(광무 6) 익종(翼宗)과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묘호(廟號)와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한 후,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세운 비문의 탁본이다. 비문의 전면은 전서로 썼고, 음기는 해서로 썼다. 고종(高宗, 1852~1919)의 어제어필(御製御筆)이다. 음기의 끝에 간기가 적혀 있어 이 비를 건립한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비석을 세운 곳은 ‘원표석(原表石)의 옆’으로 기록되어 있어 마지막으로 천장하였던 건원릉 경내임을 알 수 있다. 묘역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에 소재한다.
추숭비의 내용은 우선 익종에게 올려진 110여 자의 긴 존호가 나열되어 있다. 이어 1890년(고종 27)부터 1902년(광무 6)까지 익종에게 올린 추상존호를 연대와 함께 기술하면서 1899년(광무 3) ‘익황제’라는 시호와 ‘문조’라는 묘호를 추존한 사실을 기술하였다. 다음으로 신정왕후 역시 같은 시기에 올린 추상존호와 ‘익황후’라는 시호를 받았던 사실에 대해 기록하였다. 끝에는 고종 자신이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써서 표석을 1902년에 세운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피전자 익종의 이름은 영(旲; 원래의 음은 대이나 영으로 부르도록 정하였음),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이다. 23대 왕인 순조의 세자(世子)이며 어머니는 순원왕후김씨(純元王后金氏)로 조순(祖淳)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趙萬永)의 딸인 풍양조씨(豊壤趙氏)를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인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의 구현에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세자빈인 조씨 일족들이 그 뒤 대거 진출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 일파와의 정치적 세력투쟁이 시작되면서 정국을 혼란으로 이끌어갔고, 이와 같은 사실은 지배층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켜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민생을 도탄상태에 몰아넣고 말았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왕으로 추존되어 익종이라 하였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광무 3) 문조(文祖)와 익황제(翼皇帝)로 다시 추숭되었다.
피전자 신정왕후의 성은 조(趙), 본관은 풍양(豊壤)으로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의 딸이다. 1819년(순조 19)에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827년(순조 27)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으로 추봉되자 왕대비가 되었고, 1857년(철종 8) 순조비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73년(고종 10)까지 효유(孝裕), 헌성(獻誠), 선경(宣敬), 정인(正仁) 의 존호를 받았고, 대왕대비로 추존되었을 때 자혜(慈惠), 홍덕(弘德), 순화(純化), 문광(文光), 원성(元成), 숙렬(肅烈), 명수(明粹), 협천(協天) 등의 존호를 받았다. 1890년(고종 27) 83세를 일기로 운명하였으며 익종을 모셔두었던 수릉에 합봉되었다. 그 뒤 1899년(광무 3) 익황후(翼皇后)로 추숭되었다.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추상존호와 관련한 의궤로 『(文祖翼皇帝追上神貞翼皇后追上皇帝加上明憲太后加上明成皇后追上)上號都監儀軌』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02년(광무 6)에 문조와 신정황후를 비롯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고종, 명헌태후(明憲太后, 1831~1903)에게 존호를 추상 혹은 가상한 의례를 기록한 의궤이다. 1901년(광무 5) 11월 12일부터 명년 1월 25일까지의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금석문과 관련하여 익종의 행장(行狀)과 지문(誌文) 등을 모아 놓은 책으로, 외할아버지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 등이 지은 『수릉성장(綏陵誠狀)』과 이상황(李相璜, 1763~1841) 등이 지은 『수릉지장(綏陵誌狀)』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수릉성장』에는 익종의 행장을 비롯하여 《수릉지문(綏陵誌文)》, 《봉왕세자교명문(封王世子敎命文)》, 《죽책문(竹冊文)》, 《시책문(諡冊文)》, 《애책문(哀冊文)》, 《추숭상존호묘호옥책문(追崇上尊號廟號玉冊文)》, 《빈궁친제문(殯宮親祭文)》, 《수릉표석음기(綏陵表石陰記)》 등이 수록되어 있어 익종이 왕세자로부터 국왕으로 추존되기까지의 과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규장각에도 동일 내용의 『수릉성장』이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기 황실 추숭사업과 관련한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수릉성장(綏陵誠狀)』(장서각, 2-672) / / 『수릉지장(綏陵誌狀)』(장서각, 2-673)/ / 『수릉지문(綏陵誌文)』(장서각, 2-3974)/ / 『수릉성장(綏陵誠狀)』(규장각, 2071)/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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