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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비(完山碑)

자료명 완산비(完山碑) 저자 미상, 미상, 이완용(李完用), 이완용(李完用),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52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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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전라북도 전주 (현재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 작성시기 1900
· 비고 25352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미상
이완용(李完用)
이완용(李完用)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비문(碑文)
· 크기(cm) 149.0 X 72.1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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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900년 전주에 세운 완산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설봉묘표(雪峰墓表)
[내용 및 특징]
1900년(광무 4)에 고종이 전면에 대자 전서로 ‘완산(完山)’이라 쓰고, 그 좌측면에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 음기를 작은 해서로 쓴 비석의 탁본이다. 고종은 대한제국 설립 이후 황실의 고향 전주를 성역화하기 위해 오목대, 이목대, 완산에 각각 비를 건립하였다. 이 자료는 이 중 현존하지 않는 완산비의 탁본이다. 비 뒷면에 전라북도관찰사 이완용이 썼다고 새겨져 있다.
고종은 대한제국 설립 이후 전주이씨의 고향 완산에 여러 금석문을 세웠다. 이 가운데 오목대는 1380년(고려 우왕 6년)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자신의 고조부인 목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비문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것이다. '태조가 머무른 장소'라는 뜻으로서, 조선왕조의 몰락을 거부하고 전통 왕조를 재건하고자 했던 고종이 자신의 정체성을 다잡기 위해 이러한 비문을 새긴 것으로 해석된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 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전주이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한다. 고종 광무 4년(1900)에,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각은 당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공사로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에는 ‘발산 아래에 오목대가 평평하게 펼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7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주와 완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완산지』에는 "발산 아래에 있는 돈대이다. 평탄하게 펼쳐져 위에서 전주성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완산비’의 글씨를 쓴 이완용이 주목되는데, 그는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학부대신에서 물러나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Allen)의 주선으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896년 이범진(李範晉) 등과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시킨 공로로 박정양내각의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에 취임하고 농상공부대신 임시서리까지 겸하였다. 독립협회에도 한때 관여하였으나 외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책임을 물어 제명되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친러파로 몰려 평안남도 관찰사·전라북도 관찰사 등 외관으로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1901년 한직인 궁내부 특진관이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다. 완산비의 글씨를 쓴 시점은 1900년으로 그가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어 있을 때였다. 그는 1898년 3월 11일 부임했다가 닷새 후 직무태만으로 감봉됐고, 금전에 대한 탐욕으로 민간인의 거액 자금을 착복한 죄로 파직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완산비는 그가 지방관으로 부패하였을 당시 쓴 글씨이다.
비문에 보이는 이완용의 글씨는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썼다. 필획이 정밀하고 결구가 안정되어 섬세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호방함이 적어 내면적인 빈약함이 보인다. 결국 이 글씨는 탐욕으로 부패하였던 이 시기 이완용의 심리상태가 반영되었다고 보여진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의 전주에 대한 성역화 사업 일환을 엿볼 수 있고, 이완용의 부패상과 글씨를 함께 짚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이완용평전』/ 윤덕한 / 중심, 1999.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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