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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숙황제인릉추숭비(純祖肅皇帝仁陵追崇碑)

자료명 순조숙황제인릉추숭비(純祖肅皇帝仁陵追崇碑) 저자 이공(李玜), 김씨(金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02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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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
· 작성시기 1900
· 비고 2-5302
1900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공(李玜)
김씨(金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35.3 X 94.3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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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에 순조(純祖)와 순원왕후(純元王后)를 황제(皇帝)와 황후(皇后)로 추숭하면서 세운 추숭비(追崇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순조숙황제인릉추숭비(純祖肅皇帝仁陵追崇碑)
[내용 및 특징]
1900년(광무 4)에 순조(純祖)와 순원왕후(純元王后)를 각각 숙황제(肅皇帝)와 숙황후(肅皇后)로 추숭하면서 세운 추숭비(追崇碑)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글씨는 고종의 어필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서의 적통을 세우고, 법제도 황제의 제도를 따라 개정하였다. 종실에 대해서도 모든 명칭과 체제를 고쳐나갔는데, 이 금석문 또한 황실의 적통을 바로세우기 위한 추숭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면은 ‘대한 순조숙황제인릉 순원숙황후부좌(大韓 純祖肅皇帝仁陵 純元肅皇后祔左’라는 대자전서(大字篆書)가 3행으로 새겨졌다. 전형적인 소전(小篆)이지만 규각이 좀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동시기 함께 세워진 황제릉들의 전면 글씨와 일맥상통한다. 음기는 고종의 어필로 순조와 순원왕후의 각종 호칭이 정리되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순조의 존호는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열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이며, 각종 존호의 추상시기를 밝혔다. 왕비의 존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열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예성홍정숙황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肅皇后)이며 각종 존후의 가상 및 추상시기를 밝혔다.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인릉은 본래 순조 승하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仁祖)의 장릉(長陵) 옆에 조성하였다가, 현재 위치인 태종의 헌릉(獻陵) 옆으로 이장되었고, 순원왕후도 함께 합장되었다. 따라서 헌릉과 인릉을 가리켜 헌인릉이라 한다.
피전자 순조의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이며, 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순조(純祖)로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尊號)가 가상되어 순조의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경주 김씨 김관주(金觀柱)와 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 후로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재위 8년 이후로 정승 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래로 영조·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꺾이지 않고 강화되어 온 소수 명문 가문에 의해 주도되던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건강을 상한 데다가,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 그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른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1827년에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대로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태도와 권한이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세실(世室)로 모셔졌으며, 저술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묶여진 데 더하여 문집으로 『순재고(純齋稿)』도 있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인릉(仁陵)이다.
순원숙황후의 생애를 장서각에 소장된 《순조대왕인릉합봉비》의 내용을 토대로 살펴보면 그녀는, 1802년(순조 2) 책봉되었고 갑오년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헌종 사위시에 존위하여 왕대비가 되었다. 익종으로 추숭하여 존위를 ‘대왕대비’라 하였다. 수렴하여 청정하기를 7년을 하였다. 을유년 금상이 사위하여 수렴청정하기를 3년 동안 하였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승하하였는데 69세였다. 존호를 자헌(慈獻)이라 추상하였다. 이해 12월 17일에 인릉에 부장하고 동봉(同封)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이 금석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00년 숙황후로 추숭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장서각에는 이 외에도 순조의 인릉을 처음 조성하며 세운 《순종대왕인릉비(純宗大王仁陵碑)》(1835, 헌종 1), 순조와 순원왕후를 합봉할 때 세운 《순조대왕인릉합봉비(純祖大王仁陵合封碑)》(1857, 철종 8)를 비롯하여, 처음 인릉을 조성할 때 매장한 《순조인릉지문(純祖仁陵誌文)》, 천장했을 때 매장한 《인릉천봉시지문(仁陵遷奉時誌文)》 등이 소장되어 있어 인릉 관련 금석문 일괄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 선포 이후 왕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각종 추숭사업과 금석문의 제작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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