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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단비(肇慶壇碑)

자료명 조경단비(肇慶壇碑) 저자 미상, 이희(李熙), 윤용구(尹用求),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5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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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전라북도 전주 (현재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 작성시기 1899
· 비고 25351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이희(李熙)
윤용구(尹用求)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211.0 X 175.0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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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전주이씨 시조를 기리기 위한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조경단비(肇慶壇碑)
[내용 및 특징]
1899년(광무 3)에 전주 건지산(乾止山)에 전주이씨의 시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전면은 고종이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는 글을 전서로 썼으며, 음기는 고종이 짓고 윤용구가 글씨를 썼다. 현재 전북 기념물 제 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음기에서는 『국조선원보』에 시조묘가 누락된 일, 전주 경기전전의(慶基殿殿儀)에 건지산에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묘소가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동서 3,360척, 남복 3,120척을 지정하고 조경단을 세우고 수봉관(守奉官) 2명을 둔 일, 번창기원 등이 있다.
본문에서는 ‘전주내국가풍패지향(全州乃國家灃沛之鄕)’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그 내용은 현재의 전라북도 도청 소재지인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완산주였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 전주로 개칭하였다. 그 후 견원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고려 대조 19년(936)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쳐서 평정한 후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일컬었다가 태조 23년(940)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조선 태조 1년(1392) 이성계가 등극하자 자신의 조상이 난 고장이라 하여 완산유수부로 격을 올렸다. 태종 3년(1403)에 다시 전주로 개칭하고 부윤을 두었다. 세조 때는 진(鎭)을 두기도 하였으며 그 뒤로 줄곧 전라도 감영이 이곳에 소재하였다.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는 풍패지관(灃沛之館)으로 불린다. 전주객사 본관에는 명나라 대문장가 주지번이 유려한 초서로 쓴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주지번은 중국 남월(南越) 출신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온 차에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 송영구의 익산 집을 찾았다. 그가 전주객사에 머물면서 쓴 글씨가 현재의 현판이다. ‘풍패’란 한나라 고조인 유방이 태어난 고향 지명이다. 이성계는 이를 빌어와 전주를 역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본향이라는 뜻에서 ‘풍패지향’이라 쓴 것이다.
조경단의 ‘단(壇)’은 본래 유골이나 묘를 잃어버려 주인이 그곳에 없는, 즉 실전한 묘지의 비석에 붙이는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이 된 후 전주이씨 선원보를 만들기 위해 그의 22대조이며 시조인 사공공 이한(李翰)의 묘소를 찾았다. 전주의 건지산 기슭 어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수많은 지사들과 사람들을 동원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시조의 묘를 찾기 위한 노력은 역대 왕들도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묘지를 찾지 못하자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771년(영조 47) 시조 이한과 배비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경기전 경내에 건립하였다. 경기전은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 아래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1410년(태종 10) 창건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조선말인 1899년에 건지산 근처에 나무꾼에 의해 왕실에서 그토록 찾던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다. 시조의 묘를 애타게 찾던 왕실은 기뻤으나 어느 곳이 정확한 묘인지를 알 수 없어 지석이 발견된 능선 주선 동서 3,360척, 남복 3,120척 경내의 다른 묘소를 모두 없애고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고종실록』을 살펴보면 1889년(광무 3) 1월 25일에 ‘전주 건지산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며 관리를 두는 등의 문제는 전부 종정원(宗正院)의 의견대로 집행하며 제단 이름은 조경단이라 부르고 수봉관 두 명은 일가 중에서 특별히 둘 것이다. 비석 앞면의 글을 내가 직접 써서 내려 보낼 것이니 뒷면 글은 전 대학사가 지어 바치도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
비의 전면에 고종이 쓴 ‘대한조경단’이라는 전서는 결구가 튼튼하지만 필획이 약한 아쉬움이 있다. 비음의 글씨는 윤용구가 썼는데, 그는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난초와 대나무, 구양순풍의 해서와 행서를 잘 썼다. 조경단비의 글씨는 견고한 결구에 골기가 있는 해서로 당대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 초기로부터 왕실에서 전주이씨의 뿌리 찾기 작업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의 전주에 대한 성역화 사업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한국금석문대계』1 / 조동원 / 원광대학교출판국, 1979. 『완주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 김영래 / 전주시립박물관, 1987. 『전주야사』 / 이철수 / 전주시관광협회, 196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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