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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경묘비(永慶墓碑)

자료명 영경묘비(永慶墓碑) 저자 이씨(李氏), 이희(李熙), 민병석(閔丙奭),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19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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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강원도 삼척 (현재주소: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 273)
· 작성시기 1899
· 비고 2-5319
189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씨(李氏)
이희(李熙)
민병석(閔丙奭)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151.6 X 61.7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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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에 목조(穆祖)의 생모 이씨(李氏)의 무덤 이름을 정하며 세운 비석.
원자료제목
· 표제영경묘비(永慶墓碑)
[내용 및 특징]
조선 태조(太祖)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생모(生母) 이씨(李氏)의 무덤 이름을 영경묘(永慶墓)로 정하고 세운 비석이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광무 3) 11월 고종이 전면의 대자를 쓰고, 음기의 내용을 지었다. 음기의 서자는 민병석(閔秉奭)이다. 비석이 세워진 위치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하사전리 산 5번지이다. 현재 강원도 기념물 제 43호이다. 영경묘에서 4㎞ 떨어진 곳에 목조의 생부 양무장군(陽茂將軍)의 준경묘(濬慶墓)가 있으며 매년 4월 20일에는 전주이씨 문중에서 양 묘역에 대해 제례를 올리고 있다.
전면대자는 대한/영경묘(大韓/永慶墓)를 2행에 걸쳐 소전(小篆)으로 썼다. 『고종실록』에는 이 묘비가 세워진 배경이 보인다. 목조가 묻혀계신 삼척의 노동(蘆洞)과 이로부터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산(東山)의 목조의 어머니 무덤은 선대 임금들 사이에서도 이미 봉토를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묘에 대한 의식(儀式)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다가 1899년(고종 36)에 묘역을 다시 조성하면서 5월 25일 고종의 명에 의해 노동의 무덤이름을 준경묘라 부르고, 동산의 무덤이름을 영경묘(永慶墓)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 묘비를 세우고 제실도 세웠다.
실록을 통해 당시 묘역(墓役)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묘역공사는 1899년 5월부터 다시 논의를 벌여 묘역을 수리하고 제실과 비각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척의 두 무덤은 태조 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중하(李重夏)는 그 이유에 대해 삼척은 태조가 일어난 함경도 지역에서 매우 먼 지방이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 후 세종 때에 신하를 파견하여 수소문한 끝에 두 무덤을 찾았고, 1447년(세종 29) 처음으로 무덤을 조성하였다. 1490년(성종 21) 무덤을 수리하고 구역을 정하였으나 신중히 하자는 공론이 일어 공사를 중지시켰다. 세종과 성종 연간에 무덤의 소재파악과 축조가 이루어진 내용은 강원도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성종 연간에 무덤을 수리했던 시기에 대해 이중하는 성종 21년으로 보았고, 읍지에서는 성종 1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무덤의 봉심에서 수리, 축성까지의 기간이 수년 여에 걸쳐 진행되었고, 이중하는 묘의 축성이 한창 진행되어 가던 시점을 중심으로 보고한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두 묘역에 대해 고종은 『선원계보기략』과 『동국여지승람』, 『읍지』 등을 상고하여 무덤의 경계를 정하고 표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비문의 내용과 일치한다.
비문의 내용은 묘의 위치와 산세, 무덤의 봉심을 맡았던 이중하(李重夏)의 보고에 따라 무덤을 축조하게 된 배경과 연원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삼척의 노동에서 동쪽으로 십리 떨어진 곳은 동산이라 하고 삼척에서 삼십리 떨어진 곳은 목조의 돌아가선 어머니 이씨의 무덤이다. 묘좌(卯坐) 방향의 서쪽 산의 형세는 웅장하고 커서 주변의 산세를 포근히 감싸며 아우르고 있는 형국이다. 무덤의 봉심을 맡았던 재신(宰臣) 이중하의 보고에 따르면 현종(顯宗) 3년(1662) 부사(府使) 허목(許穆)이 『주지(州誌)』의 서문을 찬술하면서 노동과 동산 두 묘에 대해 기술한 적이 있다. 또 선조(宣祖) 13년(1580) 감사(監司) 정철(鄭澈)이 묘지를 수리․축조할 것을 청하면서 도상(圖上)에서 언급한 것이 무덤에 관한 기록의 전부이다. 열성조는 도신에게 매년 무덤을 봉심하고 수호하는 의례를 노동과 같이 할 것을 명하였다. 양 묘소를 기록한 문헌에는 영경묘소가 동으로는 구수봉(求壽峰)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방우치(方禹峙)에 이르며 남으로는 다라구미(多羅龜尾)에 이르고 북으로는 상사전동(上寺田洞) 입구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각기 땅을 헤아려 3천 3백 척에 달하는 묘역의 경계를 정해 표를 세우고 묘에 대한 의례를 노동에 대한 의전(儀典)으로 정하였으니, 아하! 이런 일을 추진함은 먼 조상에 대한 보은의 의리가 아니겠는가. 열성조가 미처 하지 못했던 일을 내가 조금이라도 해낸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종은 음기의 내용을 직접 지으면서 묘역의 조성과 비석의 설립이 곧 먼 조상의 대한 보인임을 강조했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국으로서의 위용과 품위를 갖춰나가는 데 많은 정성과 비용을 들였다. 선조에 대한 존호의 가상과 추상은 물론 선조들의 여러 묘역의 조성 등도 황실의 체모를 높이는 연장선상에서 진행하였다. 준경묘와 영경묘의 수리와 축조 등 조선왕조 선대의 묘역정비와 금석문의 수립도 대한제국기 황실의 권위와 황제권 강화를 위한 조처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준경묘와 영경묘에 대한 조선왕실의 인식과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실 추숭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고종황제의 전서어필을 확인할 수 있는 금석문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규장각 2348) / / 『읍지(邑誌)』 /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 아세아문화사, 1986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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