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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비(濬慶墓碑)

자료명 준경묘비(濬慶墓碑) 저자 이양무(李陽茂), 이희(李熙), 이근명(李根命),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18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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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강원도 삼척 (현재주소: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준경길 333-360)
· 작성시기 1899
· 비고 2-5318
189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양무(李陽茂)
이희(李熙)
이근명(李根命)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151.8 X 61.7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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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에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무덤이름을 정하며 세운 비석.
원자료제목
· 표제준경묘비(濬慶墓碑)
[내용 및 특징]
조선 태조(太祖)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생부(生父)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무덤이름을 준경묘(濬慶墓)라 정하고 세운 비석이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광무 3) 11월 고종이 전면의 대자를 쓰고, 음기의 내용을 지었다. 음기를 쓴 사람은 이근명(李根命)이다. 비석이 세워진 위치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이다.
전면대자는 대한/준경묘(大韓/濬慶墓)를 2행에 걸쳐 소전(小篆)으로 썼다. 『고종실록』에는 이 묘비가 세워진 배경이 보인다. 목조가 묻혀계신 삼척의 노동(蘆洞)과 이로부터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산(東山)의 목조의 어머니 무덤은 선대 임금들 사이에서도 이미 봉토를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묘에 대한 의식(儀式)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다가 1899년(고종 36)에 묘역을 다시 조성하면서 5월 25일 고종의 명에 의해 노동의 무덤이름을 준경묘라 부르고, 동산의 무덤이름을 영경묘(永慶墓)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 묘비를 세우고 재실도 세웠다.
실록을 통해 당시 묘역(墓役)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묘역공사는 1899년 5월부터 다시 논의를 벌여 묘역을 수리하고 재실과 비각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척의 두 무덤은 태조 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중하(李重夏)는 그 이유에 대해 삼척은 태조가 일어난 함경도 지역에서 매우 먼 지방이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 후 세종 때에 신하를 파견하여 수소문한 끝에 두 무덤을 찾았고, 1447년(세종 29)년 처음으로 무덤을 조성하였다. 1490년(성종 21) 수리하고 무덤 구역을 정하였으나 신중히 하자는 공론이 일어 공사를 중지시켰다. 세종과 성종 연간에 무덤의 소재파악과 축조가 이루어진 내용은 강원도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성종 연간에 무덤을 수리했던 시기에 대해 이중하는 성종 21년으로 보았고, 읍지에서는 성종 1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무덤의 봉심에서 수리, 축성까지의 기간이 수년 여에 걸쳐 진행되었고, 이중하는 묘의 축성이 한창 진행되어 가던 시점을 중심으로 보고한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두 묘역에 대해 고종은 『선원계보기략』과 『동국여지승람』, 『읍지』 등을 상고하여 무덤의 경계를 정하고 표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비문의 내용과 일치한다.
비문의 내용은 묘의 위치와 묘역 축성공사 경위, 비석의 조성경위 등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삼척의 서쪽 40리에 노동산이 있는데 두타산의 맥을 이어 내려오는 형세가 자못 웅장하고 산의 모양은 엎드린 호랑이와 같으니 이곳은 목조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묻힌 곳이다. 이미 죽은 상신(相臣) 허목(許穆)이 부사 시절에 주지(州誌)의 서문을 저술하면서 노동과 동산의 고적(古蹟) 2묘의 기록이 희미하고 미비한 것을 지적하였다. 또한 선조 13년(1580)에는 감사(監司) 정철(鄭澈)이 도상(圖上)으로 묘지를 수리 축조하는 일을 매우 상세하게 청한 적이 있다. 허목과 정철 모두 명신(名臣)인지라 말한 바가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국초에 군(郡)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열성조는 도(道)의 신료들에게 해마다 봉심하고 묘를 수호할 것을 명하였다. 오직 짐(朕; 고종)이 즉위한 지 36년인 기해(己亥; 1899)에 재상(宰相) 이중하를 보내 봉심하게 하고 옛날부터 전해오는 도(圖)와 지(誌)를 모두 참고하여 경계를 정해 표를 세워, 동쪽으로는 묘곡(墓谷)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주봉 뒤까지 이르며 남쪽으로 묘곡(杳谷)에 이르고, 북쪽으로 직곡(稷谷)에 이르러 묘역의 넓이가 각 3천 3백 척에 달했다. 제각(祭閣)과 비각(碑刻)을 세우고 관원을 두어 수직케 함으로 각 묘역의 예에 의거하여 제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아하! 열성조가 멀리 선대를 모시던 예절을 갖추지 못하였고, 경황이 없어 삼가지 못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오직 열성조가 자주 근신하는 것을 잊어버리신 것이다. 오늘날 가히 금석으로 받들어 모심으로써 여기에 서술한 것을 계승하려 하니 이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를 길이 없다.”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 이후 황제로서 선대왕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존하는 일련의 사업을 벌여나갔다. 준경묘와 영경묘의 수리와 축조 등 조선왕조 선대의 묘역정비와 금석문의 수립도 대한제국기 황실의 권위와 황제권 강화를 위한 조처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준경묘와 영경묘에 대한 조선왕실의 인식과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실 추숭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고종황제의 전서어필을 확인할 수 있는 금석문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규장각 2348) / / 『읍지(邑誌)』/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 아세아문화사, 1986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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