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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홍릉비(明成皇后洪陵碑)

자료명 명성황후홍릉비(明成皇后洪陵碑) 저자 민씨(閔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16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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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남양주 (현재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 작성시기 1897
· 비고 2-5316
1897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민씨(閔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22.0 X 80.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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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홍릉(洪陵)에 세운 표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명성황후홍릉비(明成皇后洪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6대 국왕 고종(高宗)의 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을미사변으로 희생된 지 2년 후인 1897년(광무 1) 왕비를 황후로 추존하고 청량리의 홍릉(洪陵)에 장사지내며 세운 표석의 탁본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을미사변에 관여한 김홍집 이하 역적들을 토벌하면서 산릉공사를 중지시켰고, 경운궁으로 환어한 이후에는 칭제와 자주독립을 촉구하는 여론을 등에 업고 대한제국을 성립시켰다. 곧이어 황후에 대한 국장논의를 재개하여 새로운 장지를 청량리로 정하였다. 의정부의 여러 신하들이 명성황후의 시호를 지어 올렸다. 시호는 ‘명성(明成)’, 능호는 ‘홍릉(洪陵)’, 전호는 ‘경효(景孝)’라 하였다. 영구 위의 글자는 황태자가 썼고, 관의 명정(銘旌)은 고종이 썼다.
표석의 탁본은 전면만이 소장되어 있는데, “대한/홍릉/명성황후(大韓/洪陵/明成皇后)”가 3행에 걸쳐 전서로 씌여 있다. 전면에 표기된 ‘대한’은 이 표석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황후에 대한 국장을 치르면서 조성한 금석문임을 나타낸다. 한편 전면이 이렇게 단촐하게 쓰여진 이유는 나중에 고종황제와의 합장을 예측한 이유이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홍릉에 합장하면서 표석의 빈칸이 채워졌는데, 이때의 표석에는 “대한/고종태황제홍릉/명성태황후부좌(大韓/高宗太皇帝洪陵/明成太皇后祔左)”로 채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1897년 10월 28일 황후에 대한 장례식은 끝났으나 산릉의 농대석(籠臺石), 병풍석(屛風石), 혼유석(魂遊石), 표석(表石) 등의 석물이 부서지거나 흑점이 생겼다. 이를 중수하기 위해 고종은 1898년 1월 11일 산릉석의중수도감(山陵石儀重修都監)을 설치하였다. 이 표석이 있던 비각(碑閣)도 이 해 5월 9일 새로이 정초(定礎)하였고, 19일에 상량을 한 후 23일에 단청 작업을 끝으로 비각의 건립을 마쳤다. 산릉석의중수도감의 비각도에는 그림만 있고 설명은 없는 상태이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생산했는데, 맏아들과 셋째 대군, 넷째 대군, 그리고 공주는 모두 일찍 죽고 둘째아들 이척(李坧)만이 살아남아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이가 곧 순종이다. 황후는 왕비로 책봉된 후 별관에 있으면서 『소학』, 『효경』, 『여훈』 등의 책을 밤이 깊도록 손에서 놓지 않았음은 물론 『사기』에도 통달하여 백관의 장주(章奏)를 친히 보았다. 황후는 자신의 지적 토대와 지식을 기반으로 고종의 정치적 결단과 판단에 도움을 주는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나아가 여흥민씨의 중심인물로 양오라버니 민승호(閔升鎬)를 비롯, 그의 친동생 민겸호(閔謙鎬), 딸이 세자빈에 책봉된 민태호(閔台鎬)와 그 아들 민영익(閔泳翊) 등과 차례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일족을 정치일선에 끌어들였다.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개화시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갈등의 여파로 일어난 임오군란의 와중에서 선혜청 당상을 맡고 있던 민겸호가 죽임을 당하는 등 민씨 일족이 부패탐학한 집단으로 지목되자 황후는 성난 군중을 피해 장호원으로 일시 피난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내적으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등 정치적 풍상을 겪으면서 외적으로는 고종과 함께 열강의 정치 경제적 침투를 막아내고자 외교노선을 다변화하였다. 청일전쟁이 진행되면서부터 일본이 노골적인 침략적 간섭을 통해 갑오개혁을 추진시키자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기 위해 친러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외교정책을 변화시킨 중심인물로 황후를 지목하고 그들의 앞날에 걸림돌인 황후를 시해하기로 계획하여 을미사변을 일으킨 결과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경운궁에서 승하한 후 고종의 능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새로 조성하면서 명성황후의 능도 함께 모셔와 3월 4일 서향 언덕에 합장하여 장사지냈다.
[자료적 가치]
명성황후 홍릉의 조성과정에서 표석과 비각의 수립과정을 이해할 수 있고, 고종황제 사후 표석의 추가기재 사실 등을 통해 대한제국기 합봉비의 제작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帖裝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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