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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목수빈휘경원천봉비(顯穆綏嬪徽慶園遷奉碑)

자료명 현목수빈휘경원천봉비(顯穆綏嬪徽慶園遷奉碑) 저자 박씨(朴氏),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97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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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양주 달마동 (현재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67)
· 작성시기 1863
· 비고 2-5297
1863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박씨(朴氏)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32.8 X 95.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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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정조(正祖)의 후궁 수빈박씨(綏嬪朴氏)의 휘경원(徽慶園) 천봉비(遷奉碑).
원자료제목
· 표제현목수빈휘경원천봉비(顯穆綏嬪徽慶園遷奉碑)
[내용 및 특징]
1863년(철종 14) 정조의 후궁 수빈박씨의 능을 양주(楊州) 순강원(順康園) 후강(後岡)에서 달마동(達摩洞: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동)으로 이장하면서 세운 천봉비(遷奉碑)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은 소장되어 있지 않고 음기만이 남아 있다. 천봉할 때 원비석의 음기부분만을 갈아 다시 새겼을 가능성도 있고, 새로운 비석을 제작하였으나 음기 탁본만이 소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음기의 내용에 의하면 수빈박씨는 1770년(영조 46) 탄생하여 1787년(정종 11) ‘가순(嘉順)’의 궁호(宮號)를 받았으며, 이후 순조를 낳았다. 1822년(순조 22) 5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현목(顯穆)’이다. 배봉산(拜峯山)에 장사지냈다. 원호(園號)는 ‘휘경(徽慶)’이다. 음기의 말미에는 두 번의 천봉사실을 기록하였다. 첫째, 금상(今上, 哲宗) 6년(1855) 10월 8일 양주의 순강원 후강(後岡) 간좌원(艮坐原)으로 이장했다고 밝혔다. 둘째, 14년(1863) 5월 8일 양주 달마동(達摩洞) 임좌원(壬坐原)으로 이장하였음을 밝혔다. 끝으로 입비 연월일을 밝혔다.
피전자 수빈박씨의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좌찬성 준원(準源)의 딸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그가 잉태될 때 어머니 원부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큰 구슬을 바치매 그 광채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한다. 어릴 때 두 여형(女兄)과 함께 있었는데 별안간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뜰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두 여형은 놀라서 넘어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으나, 그는 조용히 걸어가서 방안으로 들어가니 모두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고 한다. 1787년(정조 11)에 정조의 빈이 되어 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뒤 왕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를 위로하고 공경하여 온 궁중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또한, 행실이 착하고 예절이 바를 뿐만 아니라 평소에 말이 적으며 의복과 일상용품들을 극히 검소하게 하니 조야에서 현빈(賢嬪)이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느 날 그의 궁에서 시중을 드는 나인(內人)이 의복을 만들 때 작은 천 조각을 버렸다가 크게 꾸중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 또한 후궁인 그의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에게 은밀히 귀중품을 진상하였다가 의금부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사망하였다.
수빈박씨가 사망하자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 아래에 묘역을 정하고, 1823년 2월 27일 장례식을 거행하여 원(園)으로 삼고 수경원이라 칭하였다. 그 뒤 1855년(철종 6) 인릉(仁陵 : 순조와 비 순원왕후의 능)의 천장지(遷葬地)를 구하면서 휘경원도 천장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해 10월 6일 수빈박씨의 묘소를 양주 순강원(順康園: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묘) 후강(後岡)으로 옮겼다가 1863년 풍수지리상 부적당하다고 해 다시 양주의 달마동(達摩洞)으로 옮겨 예장하였다. 당시의 상설(象設)로는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양석(羊石) 1쌍, 표석(表石)·제각(祭閣) 등이 있었다. 또한, 휘경원을 보호하기 위해 영(令, 종5품) 1인과 참봉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현재는 광릉관리소의 관리를 받고 있다.
수빈박씨의 위패는 현재 서울 종로구 궁정동 칠궁(七宮) 안에 있는 사당 경우궁(景祐宮)에 봉안되어 있다. 경우궁은 임금의 생모라도 정실 왕후가 아니기 때문에 위패가 종묘에 들어갈 수 없어 따로 모신 별묘(別廟)로, 1824년(순조 24) 북부 양덕방(陽德坊:桂洞 전 휘문고교 교정)에 사당을 짓고, 그해 12월 궁호(宮號)를 경우궁이라 하여 위패를 모셨다. 1884년(고종 21) 10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에 의하여, 경우궁에 일시 강제로 이어(移御)한 고종은 여기에서 민태호(閔台鎬) 등 척신(戚臣)들이 참살당하는 곤욕을 겪은 후, 이듬해인 1885년 경우궁을 인왕동(현 옥인동)에 옮겨 짓도록 명하였고, 국운이 기울어지고 일제의 세력이 궁중에 범람할 무렵인 1908년(융희 2)에는 종로구 궁정동(宮井洞)에 있는 육상궁(毓祥宮: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에 저경궁(儲慶宮: 元宗의 생모궁)·대빈궁(大嬪宮: 景宗의 생모궁)·연우궁(延祐宮: 眞宗의 생모궁)·선희궁(宣禧宮: 사도세자의 생모궁)과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위패를 함께 봉향하여 6궁(六宮)이라 하였으며, 1929년 이은(李垠)의 생모 순비엄씨(淳妃嚴氏)의 덕안궁(德安宮)을 합하여 7궁이 되었다.
[자료적 가치]
정조의 후궁 수빈박씨의 천봉사실을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 / 『철종실록(哲宗實錄)』 / / 『藏書閣所藏儀軌解題』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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